[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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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 권우상
  • 승인 2017.10.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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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집을 나와 보니 당장 갈 곳이 없어 인근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짐을 거기에 맡겨 놓았다. 내가 가지고 온 짐은 꽤 많았다. 나는 노래를 하고 무용을 하기 때문에 화려한 각종 무대 의상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고전 무용을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무슨 행사가 있으면 가수나 무용수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래도 잘 불러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면 늘 1등을 해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수 활동도 했다. 군(郡)이나 면(面)에서 축제행사가 있으면 나가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리고 부산의 한 자치단체가 공모한 사랑을 주제로 한 전국노랫말 가사공모에서 <님을 기다리며>이라는 가사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작사가로 데뷔를 하였다. 그 노래가사 내용은 이렇다.

님을 기다리며

파란 하늘아래 가을꽃은 피어있는데
사랑하는 우리님은 어디에 가셨나요
바람불어 못오시나 비가와서 못오시나
이몸으로 징금다리 만들어 놓을테니
언제나 오실런지 손꼽아 기다립니다

높은 고개마다 산새들은 노래하는데
사랑하는 우리님은 소식이 없을까요
산이높아 못오시나 강이깊어 못오시나
이몸으로 구름다리 만들어 놓을테니
언제나 오실런지 눈물로 기다립니다

나는 진해에서 대학을 다닐 때 갸름한 계란형 얼굴에 예쁘게 생겨 늘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더구나 고전무용을 전공하여 춤도 잘 추었다. 대학을 나와서도 날 추근거리며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최영철과 결혼하면서 나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기훈과 두 번째로 결혼했지만 역시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내가 세 번 째로 결혼한 남자는 부산에 거주하는 박중배였다. 그는 아내가 위암으로 사망하자 슬하에 초등학생인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직업이 외항선 선장이라 장기간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날이 많아 아이들을 돌봐 줄 가정부를 구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내가 면담을 하러 부산으로 박중배를 찾아 갔다. 박중배는 나와 면담을 하면서 내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독신녀인 데다가 빼어난 미모가 마음에 들어선지 결혼을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세 번 째로 박중배와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는 54살이며 직업은 외항선 선장으로 연봉은 1억원이 넘었고 바다가 보이는 부산 해운대에서 고급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어 부유한 편이었다.

 

제2부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막 끝내고 얼굴에 화장을 하느라 안방의 경대 앞에 앉아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내 얼굴은 더욱 예쁘게 보였다. 45살의 나이었지만 돈을 잘 버는 남자와 결혼하여 마음이 편해선지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한층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은 나를 보면 지나 가다가도 한번 더 나를 힐끔 쳐다보곤 했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이 정도라면 나는 세 번째 결혼한 지금이 남편에게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이런 날이 있었나 싶었다.

며칠전 아파트 단지 내에서 미장원을 경영하는 황선엽이 와서 한 말이 환청처럼 문득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선엽은 나와 동갑인데 여고(女高)를 졸업하고 학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워 지금은 미용실 <미스황 헤어숖>을 경영하는 어엿한 사장이다. 미용기술이 남달리 뛰어나 머리를 하는 여자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어 돈도 꽤 벌었다.

나는 박중배와 결혼해서 이 아파트 단지에 온 후 파마를 할려고 자주 <미스황 헤어숖>을 찾다가 황선업과 다정한 친구가 되었는데 그녀는 미용실로 돈버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흡족하지 못해 이따금 다른 일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말하자면 돈을 벌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돈벌레였다. 내가 박중배와 세 번째로 결혼하던 해에 황선엽도 재혼을 했다. 우연의 일치로 나와 그녀는 같은 해에 재혼을 한 것이다.

내 남편 박중배는 속된 말로 뱃놈이다. 그래서 그런지 뱃장 또한 두두룩했다. 그런 뱃장으로 파나마 국적의 8만톤급 대형화물선 선장이 되었는데 나와 결혼하기 위해 한 달 동안 휴가를 얻어 집에 머물다가 다시 배를 타기 위해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꿈과 멋진 낭만 있어 좋아. 그래서 나는 바다가 좋아서 뱃놈이 된거야. 육지에서 답답한 마음도 바다에 나가면 확 터여! 그게 나는 좋아.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이 있고, 꿈이 있고 낭만이 있는 거야. 당신은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지. 그러니 노래방이든 어디든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싫컨 불러봐. 내가 이번에 외국에 갔다가 귀국하면 콘스트라도 한번 크게 열어서 가수로 키워 줄게. 비용은 한 2억 정도면 되지 않아 싶어. 그 대신 한 가지 약속을 지켜줘야 해.. 아이들에게 구박을 주지말고 친자식처럼 잘 좀 돌봐 줘. 대부분 계모라고 하면 전처 자식을 학대하는 경우가 많아. 최근 뉴스를 보니 울산에서 계모가 전처 지식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고, 서울에서는 계모가 4살짜리 여자 아이를 목 졸라 살해한 사건도 있었자나.. 내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아이들을 봐서라도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직업이 외항선 선장이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기간 아이들을 돌볼 수도 없고 해서 아이들은 돌봐줄 가정부를 둘까 생각했는데 막상 당신을 보니 생각이 바뀌어 결혼한 거야.. 그러니 친엄마와 다름없이 아이들을 잘 좀 볼봐 줘.. 그렇게 해 준다면 나도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염려하지 마세요.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키울게요. 당신 말처럼 귀국하면 콘스트는 열어 주사는 거죠?.”

“응. 꼭 열어줄게. 부부란 늘 함께 같이 살아야 사는 건데.. 직업이 뱃놈이다 보니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살 수 밖에 없어 미안해...나도 몇 년만 더 고생하고 육지에서 하는 일을 할 거야. 혼자 외롭더라도 참고 조금만 견디어 줘... 물질적으로는 고생을 안 시킬테니까 외로운 것만은 참아줘.. 그리고 외롭거던 노래방이나 어디에 가서 노래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참고 지내주기 바래... 그것이 내 부탁이야.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긴요..”

남편은 나를 보듬어 안고 입을 맞추어 주면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3년만 배를 타면 더는 안타겠다고 했다. 남편은 한국해양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결혼을 하기 위해 반년을 육지에서 생활한 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줄곧 바다에서 살아왔다. 그야말로 바다의 사나이였다. 내가 박중배와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과부처럼 혼자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돈 걱정을 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산다는 것이다. 늘 바다에 나가 있는 뱃사람 남편과 결혼해서 살아보지 않는 여자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를 이제야 나는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외항선원을 남편으로 둔 경우 여자가 춤바람이나 나서 외간 남자와 놀아나다 남편 잃고 가진 돈까지 날렸던 사례들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나는 익히 알고 있는 터이었다. 하지만 그런 메스컴에 뱃사람의 아내에 대한 불륜이 보도될 때마다 나는 결코 그런 타락한 여자가 되지 않으리라 두 번 세 번 다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고 남편의 봉급을 알뜰하게 모아 놓고 있는 터였다. 2억이 넘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 남편의 급료는 매달 해운회사에서 자동으로 내 통장에 입금되고 있는데 매달 쌓이고 쌓여 지금은 상당한 거액이 은행에 예치되어 있었고, 이 돈은 몇 년 후 남편이 배를 타지 않게 될 때 사업자금으로 쓰겠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요즘에 와서 ‘사람이 돈만 많으면 뭘 하지 이렇게 살면서’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곤 했다. 외출하지 않으면 감옥살이와 같은 32충 고층 아파트의 갇힌 공간 생활, 내가 사는 아파트 32층은 남편과 전처(前妻) 자식인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혼자 현관문을 닫고 베란다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이건 혼자 교도소 망루대에서 죄수들의 탈주를 감시하는 교도관의 영락없는 그 몰골이었다. 때로는 자신이 죄수가 되어 이 밀폐된 콘크리트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하여 머리가 어질어질 하기도 했다.

나는 아파트라고 하는 콩크리트 주거공간이 이웃을 단절하고 인간의 정서를 얼마나 메마르게, 그리고 살벌하게 갉아먹고 있는지 요즘에 와서야 실감나게 체험하고 있는 터였다. 단순하게 편리하다는 것만으로 너도 나도 선호한 아파트가 남편없이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스트레스를 더욱 증폭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야 나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경대 앞에서 로션과 입술 연지로 예쁘게 화장을 한 나는 베란다로 나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오늘따라 잔뜩 지푸린 날씨는 비라도 한줄기 퍼불것만 같았다. 6월의 하늘은 무겁고 우중충 하기만 했다. 나는 지금쯤 대서양 바다 어느 항구를 향해 가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다시 귀국할 때까지는 무려 이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세월이 마치 10년 만큼이나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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