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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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3.2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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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김치양과 헌애왕후가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줄려는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穆宗)은 병을 얻었다. 원래부터 겁이 많던 목종(穆宗)은 1009년 숭교사를 다녀 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燃燈會) 도중에 기름 창고에 김치양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지른 불이 붙어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목종(穆宗)은 슬픔에 잠겨 정사를돌보지 않고 드러 누었다.

목종(穆宗)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우복야(벼슬) 김치양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헌애왕후는 매일 신하들에게 김치양을 반대하는 무리들은 잡아들이라고 독촉을 하였지만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김치양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반대 세력들에게 살해되는 등 피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 헌정왕후는 경종(景宗)이 죽은 후 사가(私家)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成宗)은 왕욱을 귀양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통(産痛)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成宗)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 왕순이었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헌애왕후는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 왕순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개경의 숭교사로 출가시킨 후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차례 자객을 보내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대량원군 왕순은 신혈사의 노승(老僧)인 현보(顯保) 스님이 방안에 땅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책으로 왕순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왕순을 죽이지 못한 헌애왕후는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 우복야 김치양은 왕위를 노려 헌애왕후와 함께 저를 죽일려고 자객을 보내고 심지어는 독(毒)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면서 저를 죽이려 하니 속히 구명해 주시옵소서 -

이러한 내용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중간에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대령원군을 차기 어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던 유충정이 왕순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이 위기상황을 전 할 수 있었다.

편지를 받은 목종(穆宗)은 왕순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왕은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복야(벼슬)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 듣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 부사로 있던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주며 한시 바삐 신혈사로 가서 왕순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 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 할려고 생각했다.

그 날도 신혈사 주변에는 김치양이 보낸 자객이 대량원군 왕순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었다. 이를 미리 눈치 챈 신혈사 노승인 현보 스님은 대량원군 왕순을 자기 방 땅굴에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자객은 대량원군 왕순이 요사채에 있을 것이라 믿고 야음을 틈타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 갔으나 대량원군 왕순이 없자 당황한 나머지 돌아 갔다.

그후 여러 차례 헌애왕후의 자객은 신혈사에 찾아 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일려고 하였으나 어느 방에서 지내는지 몰라 번번히 실패했다. 신혈사 노승인 현보 스님이 늘 대량원군 왕순을 숨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대량원군 왕순을 죽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가운데 병으로 누운 목종(穆宗)은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유행간과 유충정이 왕명이라고 하면서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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