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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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3.2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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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으며 그들의 측근들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폐하를 알현코자 하니 어서 아뢰주시오”

하고 신하가 말하면 유행간은

“폐하께서 어떤 분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명이옵니다”

하면서 왕과의 면담을 일절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목종(穆宗)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목종(穆宗)은 스스로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한시 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왕위를 물러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穆宗)은 은밀히 충주부사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왕순을 데려 오라고 명령했다.

또한 정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西京)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불러 들였다.

강조(康兆)가 왕명을 받고 군사 5천을 이끌고 서경(西京)을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을 내사주서 위종정과 안북도호장 서기 최항(崔恒)이 찾아 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康兆)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백성들은 왕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 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강조(康兆)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고 군사를 이끌고 다시 서경(西京) 본영으로 돌아 갔다.

이 때 헌애왕후는 강조(康兆)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강조(康兆)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강조(康兆)가 오는 길목에 3천의 군사를 배치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강조는 첩자(諜者)로 하여금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동태를 낱낱이 알아내고 있었다.

헌애왕후가 강조(康兆)를 체포하기 위해 군사를 배치해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아들이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

-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란을 평정하라. 오는 도중에 김치양의 군사가 배치돼 있을 것이니 반드시 물리치도록 하라 -

는 내용의 서찰(書札)을 보냈다.

아버지의 서찰(書札)을 받아 본 강조(康兆)는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진군했는데 평주(평산)에 도착해서야 왕(목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조는 군사를 잠시 쉬도록 한 후 부장(副將) 강흥준(姜興準)에게

“왕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다니 이를 어찌한담..”

하자 강흥준은

“이왕 군사를 일으켰으니 도성을 쳐야 할 것입니다”

하자 다른 장수들도 동의하였다. 강조(康兆)는

“으음...이거야 원..”

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고 결국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목종(穆宗)을 폐립하기로 결정하고 개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군했다. 그리고 도중에서 우복야(벼슬) 김치양이 보낸 군사와 만나 일전을 벌렸다. 이 전투에서 김치양의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전멸했고 살아서 도주한 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목종의 폐립(廢立)을 결정한 강조(康兆)는 부하를 시켜 왕이 잠시만 귀법사로 몸을 피했으면 한다는 서찰을 궁궐로 보냈다. 귀법사로 피해 있으면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후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뜻이었다.

강조(康兆)는 그렇게 왕을 안심시킨 다음 군사를 이끌고 왕성(王城)으로 진군했다. 군사들이 궁궐 안으로 순식간에 밀려 들어와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강조(康兆)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강조(康兆)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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