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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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3.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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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제9장

993년에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徐熙)의 외교적 단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 10월 다시 제2차로 고려(高麗) 침략을 감행하여 거란왕(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직접 거느리고 뗏목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건넌 후 흥화진(평북 의주)를 포위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楊規)는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수성전(守城戰)을 펼쳤다. 거란왕(성종)은 사흘동안 계속 성(城)을 공격하였지만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성(城)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거란왕(성종)은 부하를 시켜 고려군측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 그대들의 전 임금 왕송이 우리 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逆臣) 강조가 목왕을 죽이고 어린 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나에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곧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시킬 것이다 -

도순검사 양규(楊規)는 서신(書信)을 받자 즉시 이 사실을 즉시 왕(현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현종(顯宗)이 이를 거부하자 거란왕은 다시 서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지만 현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왕(성종)은 전면전을 선언하게 되었고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거란군 40만 대군 중 20만은 인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은 강조(康兆)가 머물고 있는 통주로 출동시켰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로 출동하자 강조(康兆)는 군사를이끌고 나가 거란군을 맞아 싸웠다.

강조(康兆)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1 병력은 강조(姜兆)의 통솔 아래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 병력은 통주 근방 산속에 매복(埋伏)시키고 제3 병력은 통주성에 진을 쳤다.

기마병(騎馬兵)과 보병(步兵)으로 편성된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투는 사흘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거란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康兆)가 지휘하고 있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강조(康兆)는 지형(地形) 지물(地物)을 잘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 오면 검차(劒車)를 앞세우고 거란군을 공격했다. 이 같은 고려군의 검차(劒車) 전략으로 거란군은 더 이상 진군을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했다. 그러자 거란군을 이끌고 있는 장수 야율분노는 화가 나서 소리 선봉대의 부장(副將)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빨리 앞으로 돌격하라 ! ”

하지만 고려군의 검차를 이용한 전략으로 거란군은 좀처럼 앞으로 진격할 수가 없었다.

애가 탄 야율분노는 공격하라는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이 때 부장 미흘라가 옆에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장군 ! 지금 이대로는 진격할 수가 없습니다. 작전계획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꾼단 말이냐 ? ”

“야음을 틈타 기습을 하십시오”

“으음.. 그것이 좋겠구만. 성질난다고 이대로 진격할 일이 아니구만.. 그럼 야음을 타서 기습을 할터이니 전군에 하달하라 ”

“예 장군”

거란군은 야음을 틈타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가 이끄는 별동부대로 하여금 고려의 본영이 있는 삼수를 급습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거란군의 정보를 염탐군에 의해 알아낸 고려 장수 유민(庾旻)은 강조(姜兆)에게

“적군은 야음을 틈타 기습해 올 것이니 군사를 보내 미리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강조는

“지금 우리가 승기(勝氣)를 잡고 있으니 이 참에 적군을 모두 삼수 계곡으로 유인하여 한꺼번에 몰살시킬 것이다”

하고 말했다.

몇 번에 걸쳐 승전을 거듭하던 강조는 거란군의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나 군사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거란군을 삼수 깊숙한 계곡으로 유인하여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군이 고려군 본영을 습격하자 고려군은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 하였고 그 틈을 이용해 거란군의 대군이 앞쪽으로 밀려 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姜兆)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성종)에게 끌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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