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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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3.2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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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강감찬을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거란군 진영으로 향했고, 현종(顯宗)은 백관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로 내려가면서 거란군의 기습을 받아 죽음의 위험을 몇 차례 겪었으나 왕을 호위하는 중랑장 지채문과 군사들이 잘 싸워 위기를 넘겼다.

거란군은 계속 남하했다. 그래서 현종과 백관들은 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나주로 피신했다.

이 때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규(楊規)와 김숙흥은 병력을 합쳐 남쪽으로 진군하는 거란군 선봉대를 애전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 개경에서 회군(回軍)한 거란왕이 대군을 이끌고 갑작스럽게 기습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몰살하는 참패를 당했다.

양규(楊規)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화살을 수십 대 맞고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고려군과 일곱 차례나 싸우느라 많은 병력을 잃은 데다가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거란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많은 병력을 강물에 수장시키고 강동 6성을 회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가 1011년 1월이었다.

그런데 회군하던 거란군은 갑자기 회군을 멈추고 뒤돌아 고려군의 선봉대에게 달려 들었다. 고려군으로써는 뜻밖의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이 때 거란왕(성왕)이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거란군이 고려의 땅에서 회군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그러자 고려군의 선봉에 선 양규(楊規)가 말했다.

“두 가지 조건이 무엇이냐 ?”

“첫째는 고려국왕이 거란에 입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

“두 번째 조건은 강도 6주를 반환하는 것이다"

“우리 고려가 두 가지 조건을 거부한다면 어찌할 것이냐 ?”

“다시 고려를 공격할 것이다”

“우리는 거란의 두 가지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

“이제 고려의 입장을 알았으니 다시 공격할 것이다”

거란왕은 그렇게 말하고 일단 회군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012년 3월에 거란왕은 사신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왕(현종)이 거란의 요구를 거부하자 거란왕은 야율행평과 이송무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고려를 치라고 명령했고 야율행평과 이송무는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으나 고려군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하지만 거란은 또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1013년 거란왕 성종은 소적렬에게 군사 8천을 주어 고려를 치게 하자 소적렬은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를 공격해 왔다. 고려에서는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거란군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패배하여 돌아갔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에게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양규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일백 석을 내리고 은율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현종은 교서에서

- 병사들을 지휘하여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하였도다.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고 사기가 또한 높았도다. 이러한 훈공은 후대에까지 영원히 남을 것이로다 -

하였다.

이 글만 보더라도 양규의 용맹과 기개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장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관직을 주면서 현종은

“지조가 탁월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 방면에도 통달한 인재로다”

하면서 양대춘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모두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한동안 잠잠하던 거란군의 침략은 또 다시 계속되었다. 거란은 1014년 1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했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흥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의 장군 고적여와 조익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격퇴 당했다. 하지만 거란군은 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고 이번에도 역시 패하여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시 거란이 침입했는데 여진이 거란을 도와 선박 20척을 이끌고 다시 구두포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번번히 실패하여 퇴각했다.

이렇듯 쉴새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 다시 야율행평을 고려에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며 야율행평을 억류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에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고 언질을 주었다.

마침내 거란왕(성왕)은 1016년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고려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퇴각하자 거란왕은 이듬해에 소합탁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고려를 침략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려군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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