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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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0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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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에서 거란의 소배압이 지휘하는 군사와 강감찬이 지휘하는 군사들은 정면으로 전투를 벌렸다.

처음에는 양쪽 군사들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전투였지만 김종현이 지휘하는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풍향(風向)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싸우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거란군의 사상자는 더욱 늘어났다.

전세(戰勢)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의 소배압은

“후퇴하라 ! 후퇴하라 !

하고 소리쳤다.

거란군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감찬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적을 추격하여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섬멸하라 !”

고려군은 달아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거란군을 거의 모두 섬멸시켰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상감찬은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왕은 침히 영파역(迎坡驛)까지 나와 장막을 치고 음악을 우렁차게 울리며 강감찬의 개선을 환영해 주었는데 이 때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금으로 만든 꽃을 여덟가지나 꽂아 주고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바른 손으로 술잔을 권하며 강감찬의 훈공을 칭송하였다.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거란 장수 소배압을 비롯해 불과 1천여 명 뿐이었다.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참패였다.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되돌아 간 소배압에게 거란왕(성종)은 크게 분노하여

“군사 10만 명을 다 잃고 무슨 낮짝으로 돌아왔느냐 말이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 봐라. 계속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개경까지 밀어부칠려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렸다. 거란 역사상 이런 참패는 없었다. 10만 군사를 다 죽여 놓고 혼자 살아서 돌아오다니...에끼 이못난 놈 같으니라구...”

하고는 소배압을 관직에서 추방했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은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었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강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강감찬은 성종대에 과거에 장원급제 한 문인이며 수차례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경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 내 쉬기도 했으며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4세인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현종은 거란과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국력을 신장시켰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1031년 5월 재위 22년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현종의 능은 송악산 기슭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이다. 현종은 원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었다. 13명의 부인중 원정왕후 김씨는 소생이 없었고 원화왕후 김씨가 덕종, 정종을 비롯하여 2남 2녀를 낳았고, 원혜왕후 김씨가 문종을 비롯하여 2남 1녀를 낳았으며 원용왕후 유씨와 원목왕후 서씨는 소생이 없었다.

그리고 원평왕후 김씨 1녀, 원순숙비 김씨 1녀, 궁인 한씨 1남, 궁인 박씨가 1남을 낳았다. 그 외 원질 귀비 왕씨와 궁인 이씨는 소생이 없었다.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은 16살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덕종은 현종의 장남으로 제3비 원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1016년(현종 7년) 5월 을사일(乙巳日)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흠(欽)이고 자(字)는 원량(元良)이다.

1020년 5살의 나이로 연경군에 책봉되었다가 2년 뒤에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1031년 5월 현종이 죽자 중광전에서 16살의 어린나이로 고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덕종은 먼저 선대 왕들에게 즉위를 알리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해 주었다. 또한 각 지방에서 진상된 말(馬)을 대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화합정치를 표방하였다.

즉위 2개월 후에는 유소를 중군병마원수로 삼고 장주맹을 병부상서, 홍빈을 형부상서로, 이유섬을 공부상서로, 김종현을 우간의대부로, 황보영을 어사잡단으로, 문사명을 전중어사로, 손위를 전중승으로, 박의부를 감찰어사로 임명하는 등 참신한 인물로 교체하여 새롭게 정사를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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