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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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0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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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조정의 백관이 안정되자 덕종은 유교와 김행공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거란이 압록강에 설치한 다리를 철거하고자 함이오. 다리를 거냥 둔다는 것은 거란이 언제든지 쉽게 우리 고려를 침략할 수 있어 하루 빨리 이 다리를 없애야 할 것이니 경들은 거란에 가서 압록강 다리를 철거하겠노라고 알려주시오. 그리고 거란과의 전쟁중 포로로 잡혀간 우리 고려인을 모두 송환토록 하시오”

유교와 김행공은

“폐하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토록 하겠나이다”

하였다. 김행공이 말했다.

“폐하 ! ”

“말씀하시오”

“만일에 거란이 우리의 요구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어찌하오리까 ?”

“강력하게 요구하고 그래도 우리의 뜻을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임의로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하겠다고 하시오. 또한 우리 고려인을 송환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시오”

하는 왕의 말에 유교는

“선왕대에 세 차례에 걸려 거란과 전쟁을 하느라 백성들이 몹시 지쳐 있사온데 또 다시 전쟁을 한다 하시오이까 ?"

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전쟁만은 피해야 할 줄 아옵니다”

하는 유교의 말에 왕은

“짐도 전쟁을 원하지 않소이다. 하지만 압록강에 설치한 다리 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철거토록 해야 할 것이며 포로로 끌려간 우리 고려인도 반드시 송환토록 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폐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다 하겠사옵니다”

하는 김행공의 말에 유교는

“폐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유교와 김행공 두 사신은 거란으로 들어가 거란왕(성종)에게 고려의 요구사항은 알렸다. 하지만 거란왕은 고려의 요구사항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려는 거란에 대해 시절단 파견을 중지하고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거란은 고려의 사절단이 중지되자 1032년 2월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고려의 거부로 입국하지 못했다. 고려는 압록강 다리를 철거하고 억류중인 고려인을 돌려 보내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며 삭주 영인지(영흥)와 파천에 성(城)을 쌓아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고려(高麗)가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자 군사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1033년 10월 거란왕은 야율세룡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야율세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高麗)의 정주성을 진격하였다.

그러자 1만의 고려군 기마병은 상군(上軍)과 하군(下軍)으로 각각 5천씩 군사를 나누어 산속에서 거란군을 기다렸다. 거란군이 정주성에서 한 5리 쯤 떨어졌을 때였다. 그때껏 죽은 듯 잠잠하던 고려군이 일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상군의 군사들이 일시에 창칼을 번뜩이며 거란군을 향해 돌진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한찬동안 지속되면서 거란군은 대열이 흩어지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하군 부대가 도주하는 거란군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앞뒤로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그야말로 수라장이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자, 서로 같은 편끼리 적으로 알고 싸우는 자, 덮어 놓고 도망치다가 길을 잘못 잡아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 올바르게 마주 싸우는 자라고는 몇몇 되지 않았으니 거란군의 절반 이상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나머지는 산산히 흩어져 도주했다.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해 군사적인 도발 행위를 감행하지 못했다. 덕종은 1034년 9월에 갑자기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아우인 평양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19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숙릉이다.

덕종(德宗)은 경성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2비 경목현지에게서 1녀, 충주 유(劉)씨에게서 1녀 등 2명의 공주를 얻었다.

제1비 경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딸이며 원순숙비 김씨 소생이므로 덕종과는 이복 남매간이다. 그녀는 1034년 2월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덕종 사망 후 52년을 더 살다가 1086년 7월에 주었다.

제2비 경목현지 왕씨는 중서령 왕가도의 딸이다. 1031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므로 경성왕후 보다 먼저 왕비에 올랐으나 왕족이 아닌 까닭으로 제2비가 되었다. 소생으로 상회공주 있다. 제3비 효사왕비 김씨도 경성왕후와 마찬가지로 현종의 딸로서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그녀도 덕종(德宗)과 이복남매간이 되고 제11대 왕 문종과는 동복남매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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