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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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0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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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10장

덕종(德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靖宗)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5세 때 내사령과 평양군으로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고 대사면령을 내려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崔沖),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등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또한 온건파인 황보유의를 내사문하 평장사로 임명하여 거란과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북창성에 성(城)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키고 덕종(德宗)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작업을 지속시켜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거란에서는 통첩을 보내 천리장성 축조를 중지할 것과 동시에 국교를 정상화 시킬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자국의 국방을 위해 성(城)을 쌓는 것은 당연하며 거란에 억류된 고려 사신들을 돌려 보내고 거란이 무력으로 점령한 압록강 지역을 돌려주면 국교를 정상화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고려(高麗)가 타협책과 강경책으로 양면전략을 구사하자 거란은 일단 압록강에 해군을 보내 고려(高麗)에 대해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결국 화의책으로 거란에 억류중인 고려 사신들을 돌려 보냄으로써 1038년 4월 양국의 외교관계는 정상화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파견하고 그해 8월부터 다시금 거란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무력 충돌은 일단 중지 되었다.

고려는 천리장성 축조작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했고, 1044년 마침내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했다.

천리장성 완성으로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북방족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마련했고, 또한 북방 문화에 의한 고려 풍속 침해를 막아낼 수 있는 문화 방비벽을 열게 되었다.

이 같은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으로써 내부 기강 확립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항상 북방의 각종 호한(胡亂)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전면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거란족과 여진족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高麗) 땅에 와서 곡식과 가축 등을 약탈해 가고 있었다.

이들 오랑케는 동북쪽 여진족(女眞族), 북쪽 중앙의 거란족(契丹族), 서북쪽의 몽고족(蒙古族)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남하정책을 펴서 서로가 경쟁하다시피 고려 땅을 침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고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도 이들이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1045년 몽고는 고려와의 군사동맹 관계를 맺자고 요청해 왔다. 그러나 고려의 대신들은 몽고와의 군사동맹을 맺는 것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몽고는 거란족과 다름없는 흉악한 오랑케로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군부(軍部)의 여론도 그렇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서좌승 김원충의 의견은 달랐다.

“몽고는 지리적으로 거란을 중간에 둔 강한 나라이옵니다. 그러한 몽고군과 군사동맹을 맺는다면 거란군을 격멸할 수 있고 고려는 싸우지 않더라도 감히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우리의 힘이 약하거나 우리 스스로의 신의를 잃었을 경우에 있는 일이니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가까운 적 거란을 견제하는 데는 더 없는 군사적 현명책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몽고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이것이 김원충의 주장이었다.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왕에게 건의했다.

그 당시 몽고군의 장수 합진(合眞)은 대요국을 자랑하고 있던 거란족의 군대와 으르렁 대고 있었는데 고려군과 연합해서 거란군을 격파할 생각을 가지고 자주 고려군에게 군사동맹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몽고군 또한 신임할 수 없는 오랑케 족속이었으므로 군부의 여러 장군들은 이 고몽군사동맹(高蒙軍事同盟)을 꺼리고 반대했던 것이다.

“몽고나 거란이나 모두 흉악한 오랑케로서 믿을 수 없습니다. 몽고에 속아서 이용당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하는 것이 군부의 여론이었다. 하지만 김취려(金聚侶) 장군의 의견은 달랐다.

“국가의 이해가 바야흐르 오늘의 몽고군과의 동맹 여부에 있습니다. 만일 동맹을 요청해 오는 몽고군 합진 장군의 뜻을 모른 척하면 후회할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할 사태로까지 이를까요 ?”

장군 조충(趙忠)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도 김취려 장군과 같은 생각이었으나 막료들의 반대 때문에 조금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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