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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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0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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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회

고려와 몽고가 군사동맹을 맺은 첫 기념사업으로서 신속히 공동의 숙적(宿敵)인 거란군 본거지를 격파하자는 작전계획이었다.

“공격하라 !”

는 명령이 떨어지자 귀신도 모르게 행동한 고려와 몽고의 동맹군들은 일제히 거란군의 본거지인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3백 보 거리에서 정지했다.

“성에 쳐들어가서 희생을 내지 말고 놈들이 제발로 기어 나와 항복하게 합시다”

이 전술은 김취려 장군의 묘안이었다.

독안에 든 쥐가 된 거란군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적군 50여 명은 성을 넘어서 항복했고 나머지는 성문을 열었다.

이때 거란군의 괴수인 왕자(王子) 감사(感捨)는 스스로 목을 나무에 매달아 자살했고 군대와 부녀자 5만 명이 무조건 항복했다. 조충(趙忠) 원수와 합진(合眞) 장군과 김취려 장군 부하들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시킨 뒤에 왕자 감사(感捨)의 처자와 고관(高官) 및 장군들은 참수했으나 군졸과 부녀자에게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관대하게 용서했다.

이런 무혈 대승리를 거둔 뒤에 몽고의 합진(合眞) 장군은 고려군 장병들에게 치하의 인사 겸 전승(戰勝) 보고를 했다.

“우리는 만리 길을 원정해 와서 고려와 협력하는 영광을 얻어 무도한 거란군의 항복을 받았으니 실로 천재(千載)의 경사입니다. 예의상으로는 당연히 고려의 왕을 배알하고 감사를 아뢰어야 하겠습니다만 휘하의 장병들이 많고 길이 멀어서 뜻을 이루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여깁니다. 다만 소인의 대리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에 대해서 조충 원수와 김취려 장군는 공동으로 답사를 발표했다.

“이번 승전으로 인해 고려와 몽고 두 나라는 길이 형제의 나라가 된 것을 증명했습니다.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 날의 기쁨을 잊지 말기를 바라며 또한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고려군 측에서 합진(合眞) 장군의 위로 겸 송별연을 성대히 베풀어 주었다. 합진 장군은 거란군의 포로 중에서 부녀자와 소년 8백여 명, 그리고 거란에 납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노예처럼 고생하며 살던 고려인 309여 명을 돌려보내 주었다.

고려에서는 선물로 받은 거란인들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 각각 적당한 지방으로 분산시켜 경작할 농토를 주고 보호했는데 이 신부(新附)의 백성들의 부락을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라고 하였다.

1039년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樂工)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科擧)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靖宗)은 일련의 사회안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정종의 통치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올라 기력을 탕진한 탓에 몸이 병약해졌고 나약한 성품으로 정사에 몰두하다가 중병을 얻어 드러 눕고 말았다. 이때가 1046년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이복동생인 낙랑군 휘(徽)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재위 11년 8개월만이었다.

정종(靖宗)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었다. 선대 왕들과 달리 5명의 부인이 모두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이는 신하들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5명의 부인중 제1비 용신왕후 한씨가 1남을 낳았으며 제2비 용의왕후 한씨가 애상군 방, 낙랑군 경, 개성후 개 등 세 아들을 낳았고, 제3비 용목왕후 이씨가 도애 공주를 낳았다. 이들 외에 제4비 용절덕비와 제5비 연창궁주 노씨는 소생이 없다.

용신왕후 한씨는 단주 사람으로 한조의 딸이다. 그녀는 정종이 평양군으로 있을 때 혼인하였으며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연흥궁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035년 아들 형(亨)을 낳았다. 아들을 낳은 그녀는 곧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어 혜비로 불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왕후에 봉해졌으나 1036년 7월에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문종 2년에 용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능호는 현릉이라 했다.

용의왕후 한씨 역시 한조의 딸로 용신왕후의 친동생이다. 언니를 따라 궁중에 들어왔다가 1038년 4월에 여비에 책봉되고 창성궁주라는 택호를 받았고 후에 다시 현덕궁주라고 호를 고쳤으며 1040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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