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15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91회

문종이 처음 흥왕사를 창건할려고 하자 대신들은 반대를 했지만 문종은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興王寺)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1055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 8백 칸의 거대한 규모의 사찰로 대궐의 크기와 비슷했다.

문종(文宗)은 또 여기에다 금 144근, 은 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고 사찰 주변에 성(城)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을 구축 할수 있도록 하였다.

계행이 청정한 1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었던 흥왕사는 문종(文宗) 대 이후 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속종 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 온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문종(文宗)은 최충(崔沖)을 가장 신임했다. 재정된 법률을 검토하는 자리에서도 왕은 최충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이때 최충은 이미 70이 된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퇴직을 청했다. 문종은 퇴직을 청하는 최충을 극구 만류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문하시중 최충은 누대로 내려오며 선비들의 영수이며 우리 나라의 덕망 높은 장노이다. 이제 비록 나이가 들어 은퇴를 청원하나 내 어찌 그의 청을 허락하겠는가 ? 주관 부서에서는 마땅히 전래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그에게 안석(安席 : 앉을때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를 주고 국사를 돌보게 하라.....”

하지만 최충(崔沖)은 연로하였고 국법으로도 나이가 일흔이면 퇴임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결국 태사 겸 문하시중에 임명되면서 치사(致仕 : 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가 허락되었다.

이때 문종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다시 말했다.

“어진 신하를 얻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요 임금은 여덟 명의 인재를 중용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주변 왕실에서는 네 명의 현인을 맞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재상 자리를 주고 그들의 충직한 계책을 채납(採納 : 의견을 받아들임)하여 왕정을 빛나게 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현명한 보좌를 받아 임금의 지모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바로 다스리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며 영원무궁한 국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 나라에 이런 현철한 옛 사람에 견줄 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짐은 그런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듯 최충(崔沖)을 존경하는 문종은 그가 퇴직한 후에도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문의하도록 하였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최충(崔沖)은 문하시중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하고 있던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총 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것이다.

구재학당(九齋學堂)은 아홉 개의 학반(學班)으로 나누었는데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삼사(史記, 漢書, 後漢書), 시(詩), 부(賦), 장(章)을 말한다.

70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구재학당을 세워 고려 사회에 사학의 열풍을 일으킨 최충(崔沖)은 1068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최충(崔沖)은 유선, 유길 두 아들을 두었으며 최유선은 벼슬이 상서령에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최충을 계승하여 유림의 영수로 지냈으며 사추, 사제 등 그의 아들 또한 문재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다. 최충은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무신정권시절에 거의 사라졌고 몇 절의 시구와 금석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종(文宗)은 여러 분야에 걸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음의 날이 다가왔다. 1082년 인절현비 이씨가 죽고 이듬해 4월 9번째 왕자 왕침이 죽고난 다음 실의에 빠진 문종(文宗)도 갑자기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5월부터 일어나지 못하다가 7월에 태자 훈(勳)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했다. 이때 향년 65세로 재위 37년 2개월째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