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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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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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6회

제11장

 

선종(宣宗)의 뒤를 이어 고려 제14대 왕으로 등극한 헌종(獻宗)은 선종(宣宗)의 장남이자 제2비인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乙未日)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욱(昱 : 王昱)이다. 1094년 5월 선종(宣宗)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중광전에서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1살의 어린 헌종(獻宗)은 유아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늘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권(王權)이 선종(宣宗)의 동생들 중에서 한 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선종(宣宗)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계림공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왕권이 선종의 어린 아들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덕종, 정종, 순종 등이 이미 어린 아들보다 동생에게 왕권을 넘겨오던 관행에 비추어 신하들은 어린 아들에게 왕권을 넘긴 것이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니 왕위를 노리고 있던 계림공 왕희(王熙)를 비롯한 선종(宣宗)의 동생들은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헌종(獻宗) 즉위 당시에 살아있던 선종(宣宗)의 동생은 계림공 왕희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 조선공 왕도, 상안공 왕수, 보응승통 왕규, 부여공 왕우, 진한후 왕유 등 모두 7명이었다.

이 중에서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보응승통 왕규는 이미 승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나머지 5명이 편을 갈라 세력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들 5명은 다시 인예왕후 이씨 소생과 인경현비 이씨 소생으로 나눠졌는데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는 왕희와 상안공 왕수가 있었고, 인경현비 소생으로는 왕도, 부여공 왕우, 왕유가 있었다.

그러나 서열상으로 보나 대의명분으로 보나 선종(宣宗)의 동복(同腹) 동생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왕희(王熙)가 가장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왕희를 추종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모후 사숙태후가 섭정(攝政)을 시작했다. 사숙태후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이름은 바꾸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과 군사를 포함한 모든 정사(政事)를 보았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헌종(獻宗)은 날이 갈수록 몸이 더욱 허약해지고 앓아오던 소갈증(당뇨병)도 더욱 심해졌다. 이것을 기회로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 소생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려는 음모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원신궁주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한산주 왕윤이었다. 그런데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는 왕윤을 차기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로 사숙태후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이자의는 호부상서로 있다가 헌종(獻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중추원사로 승격되었으며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주 이씨 가문(家門)의 세력들이 이자의를 추종하며 떠받치고 있었다.

또한 이자의는 재력가였으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남의 눈을 피해 몰래 깊은 산속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들 사병은 검술과 창술 등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으며 유사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전법(戰法)을 익히고 있었다.

이자의는 가끔 사병들이 훈련하는 장소에 은밀히 나타나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먹여 사병(私兵)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사병(私兵)들은 이자의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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