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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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3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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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고려(高麗) 제18대 왕으로 등극한 의종(毅宗)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3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4월 경오일(庚午日)에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철(徹), 이름은 현(晛), 자는 일승(日升)이다.

114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46년 2월 정묘일(丁卯日)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대관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의종(毅宗) 초기에는 인종 대의 공신의 원로 김부식과 문하시중 인원후가 이끄는 개경의 문신귀족 세력이 조정을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의종)(毅宗)은 이들 문신들이 왕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하자 환명을 느끼고 근위 세력 형성에 주력하였다.

문신들은 대간들을 중심으로 정사에 관한 많은 의견을 내놓았는데 의종이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모두 출근을 하지 않았고, 왕의 측근들에 대해서도 많은 탄핵을 하여 기어코 그들을 축출하곤 하였다.

의종(毅宗)은 문신들의 이러한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근위 세력을 형성하여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근위 세력의 중심 인물은 환관(宦官) 정함, 내시사령 영의, 형부낭중 김존중, 정7품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내시이거나 내시(內侍) 출신들이었다. 의종은 이들과 함께 거의 매일같이 격구(擊毬)나 수박희(手搏戱 : 택견을 말함)을 즐기며 정사를 등한시 하였다.

심지어는 어떤 때는 닷세동안 줄돋 격구(擊毬)만 관람하여 아예 편전에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의종(毅宗)의 이 같은 행동은 문신(文臣)들의 지나친 행동 규제에 반발한 고의적인 처사였다.

이처럼 의종(毅宗)이 정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1147년 3월 서경에서 이숙, 유혁, 숭황 등이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이듬해 10월에는 이심, 지지용 등이 송나라 사람 장철과 공모하여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반란을 계획하다가 송나라 도장 임대유의 고발로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역사건이 이어지자 대간들은 일제히 왕이 방만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르고 있다면서 왕 측근에서 방만한 생활을 부추기는 환관과 내시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의종(毅宗)은 대간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신들은 합문 밖에서 사흘동안 무릎을 꿇고 버티었다. 이 같은 문신들의 강한 요구에 승복한 의종은 1148년 3월에 내시 김거공, 환관 지숙 등 7명을 숙청시켰다.

의종(毅宗)은 다시금 근위세력을 형성하여 김존중과 정서를 측근 신하로 삼고 1151년 자신의 행동을 철저하게 규제하며 대관들의 상소를 주도하던 추밀원 지주사 정습명을 삭탈관직하여 유배시켰다.

이 사건이후 문신(文臣)들의 사기가 위축되자 의종은 조회(朝會)시 조정에서 직접 간관들이 간언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문신들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의가 찬 반격작전이었다. 또한 정습명을 제거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김존중을 우승선으로 지위를 격상시켜 근위세력에게 힘을 더해주었다.

왕의 절대적 신임으로 권좌에 오른 김존중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서(鄭敍)가 대령후 왕정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환관(宦官) 정함과 공모하여 좌간의 왕식과 기거주 이원응으로 하여금 정서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을 역모죄로 왕에게 고변했다.

이 일로 정서는 동래로 유배되고 의종에게 항상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던 대령후 왕경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천안부로 유배되었다. 이 때가 1157년이었다.

의종(毅宗)은 문신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근위 세력 확충에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내관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였다.

그 결과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내관들 중에 특히 환관들이 왕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남용하는 바람에 정치가 부패되고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 그래서 백성들은 [환관정치]라고 말하였다.

고려 시대의 내관(內官)은 고자(여자와 성관계를 할 수 없는 남자)로서 내시(內侍)직에 있던 환관(宦官)과 고자가 아닌 문관 출신이면서 궁궐 내부 일을 맡아 보던 일반 내시(內侍)가 있었다.

내시(內侍)직에 주로 고자(성관계를 할 수 없는 남자)를 기용하는 것은 궁궐 안에는 궁녀들이 많아 불륜(不倫)한 성관계를 막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궁궐안의 여자는 모두 왕의 여자(女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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