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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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6.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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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함이 끌어들인 남경의 관노 출신 백선연과 왕광취는 왕의 침실을 제 방처럼 드나들며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그들에게 아부하던 서리 진득문에게 보청판관 벼슬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또 백선연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관비 출신 궁녀 무비는 뛰어난 미모(美貌)로 왕(의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며, 광주의 서기 김류는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백선연에게 바쳐 내관의 벼슬을 얻기도 하였다.

정함의 세력은 단순히 내관(內官)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과거(科擧) 출신으로 첨사부 녹사로 있던 김존중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김존중은 정함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내시(內侍)에 소속되어 있다가 다시 형부낭중 기거주 보문각 동제학에 올랐다.

이 때 김존중은 정함과 협의하여 대간들을 이끌며 의종(毅宗)의 행동을 규제하던 정습명을 탄핵하여 죽게 하였다. 그러자 정함은 그를 왕에게 극력 추천하여 김존중은 우승선에 올랐다.

우승선에 오른 김존중은 내시중랑으로 있던 정서를 역모죄로 몰았다. 정서(鄭敍)는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의 여동생 남편이었으므로 의종(毅宗)에게는 이모부였다.

정서(鄭敍)는 평소 의종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며 한때 그를 밀어내고 왕이 될 뻔했던 대령후 왕경과 왕래가 잦았다.

의종에게는 그들의 친분이 못마땅했고, 그러한 의종의 내면을 읽고 있던 정함과 김존중은 정서(鄭敍)와 대령후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했던 것이다.

김존중 역시 정서(鄭敍)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터였기에 좌간의 왕식과 기거주 이원웅을 시켜 정서(鄭敍)를 역모죄로 탄핵하게 하였다. 이 고변으로 정서(鄭敍)는 동래로 유배되었으며, 이 유배지에서 [정과정곡]을 등의 [고려가요]를 남겼다.

이후 김존중은 정함과 결탁하여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는 등용하고 거역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하였으며,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아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의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아 챙겨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살았다.

1156년 그가 등창으로 앓아눕자 아부하는 자들이 그를 문병하기 위해 집 밖에까지 줄을 지어 섰다. 그리고 그가 죽자 의종(毅宗)은 매우 슬프하여 그에게 수충내보 동덕공신의 칭호와 이부상서 정당문학 수문전 태학사 벼슬을 추종하였다.

정함과 함께 의종(毅宗)의 힘에 의존하여 권력을 남용하던 또 하나의 인물은 점쟁이 영의(永義)였다. 반역자의 후손인 영의는 정함에 의해 내시(內侍)에 발탁되었다가 내시사령으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점술(占術)에 능하고 풍수에 통달했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그러자 의종(毅宗)은 그의 말을 믿고 항상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중승 고영부와 시어사 한유정, 최균심 등이 합문 밖에 엎드려 3일동안이나 그를 내쫓을 것을 상소했으나 의종(毅宗)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의종(毅宗)의 신임이 두터웠던 점쟁이 영의는 왕을 이 사찰 저 사찰로 데리고 다니면서 항상 기도하고 제사할 것을 조언했으며, 의종(毅宗)은 영의의 말에 따라 법회를 열기도 하고 재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대간들이 모두 출근을 거부하며 왕에게 미신(迷信)에 따른 제사의식을 멈출 것을 간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영의(점쟁이)의 권력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래서 주의에는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항상 벌떼처럼 모여 들었다.

또한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들 내관들은 모두 [정중부의 난] 때 효수되거나 참형에 처해졌다. 무신들의 반란은 곧 환관정치의 종식이자 내관들의 몰락을 의미했던 것이다. 즉 무신(武臣)들의 반란은 의종(毅宗)의 환관정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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