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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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6.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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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최충헌의 독재정치와 민란(民亂)

 

(14)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명종(明宗)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명종은 무관(武官)들의 힘에 눌려 정치를 하다보니 무관정치(武官政治)를 하는 꼴이 되었다.

왕(명종)은 유명무실(有名無實)하여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관(武官)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곳곳에서 반란이 잇따르고, 이로 인해 국가 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틈을 타서 전국에서는 도적들이 들끓었다.

명종(明宗)은 인종(仁宗)의 넷째 아들이며, 공예왕후 임(林)씨 소생으로 1131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흔(欣)이고 이름은 호(皓), 자는 지단(之旦)이다. 1148년 익양후에 봉해지고 후에 다시 익양공으로 승진되었으며, 1170년 9월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등이 의종(毅宗)을 퇴출시키고 동복(同腹) 아우인 익양공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고려 제19대 왕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명종(明宗)은 인종(仁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이러한 사정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은근히 왕위를 탐냈다. 어쩌면 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평소에도 반란이 일어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왕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전첨 최여해(崔如海)가 꿈을 꾸었는데 의종(毅宗)이 익양공 왕호에게 홀(笏)을 주니 익양공이 그것을 받아 용상(龍床)에 올라 앉았다. 최여해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꿈을 신기하게 여기고 왕호(王皓)에게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왕호(王皓)는

“오늘 나에게 한 말을 누구에도 하지 마시오. 만약 이 말이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우리 두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하였다.

의종(毅宗)은 원래 도참설(圖讖說)을 신뢰하여 아우들이 왕위를 넘볼까봐 두려워 하였는데 만약 최여해(崔如海)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평소에 내심 왕위를 넘보고 있던 차 최여해의 꿈 이야기를 들은 왕호는 왕위에 오를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정중부, 이의방, 이공 등이 의종(毅宗)을 몰아내고 익양공(왕호)을 왕으로 추대하였을 때 그들의 제의를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가 평소에 왕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막상 왕위에 오른 그는 실권도 없이 하수아비 노릇만 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은 반란을 일으킨 무관(武官)들이 거머쥐고 있었고, 명종(明宗)은 무관들의 권력쟁탈 속에서 하루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에만 급급했다.

명종(明宗)은 성격이 소심하고 우유부단(優柔不斷)했다. 그리고 겁도 많았다. 그래서 명종은 왕위에 오르자마다 곧 바로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을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고, 양숙, 채원 등은 그 다음 자리에 두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무관(武官)들은 중방을 설치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 위해 제 작기 세력을 키우는데 혈안이 되었다.

1171년 정중부와 이의방에 비해 자신이 홀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이고(李高)는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무뢰배들과 결탁하여 은밀히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김대용의 밀고(密告)로 이고(李高)의 거사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고(李高) 일당은 채원(蔡原)과 이의방에게 체포되어 참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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