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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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1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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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또한 기씨 일족인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고 김용을 판삼사사로 삼았으며, 최유를 좌정승에 임명하였다. 그 외에도 원나라 연경에 있는 고려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정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배경으로 요양성 병력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갔다.

최유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공민왕은 경천흥과 안우경에게 군사를 내주고 서북부 일대를 방비토록 하였다.

그때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여 함락시켰고, 배주한 고려군은 안주에 진을 쳤다. 그 후 최유의 군대는 선주를 근거지로 남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최영은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최유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최영의 군사들에게 쫓긴 최유는 잔병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원나라 왕 순제에게 대병력을 요구하며 고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원나라 감찰어사 누린은 원나라 왕 순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폐하! 최유의 말대로 대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정벌해서는 아니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고려와 전쟁을 하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하오니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요청하는 최유의 말을 들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지금 최유는 황제 폐하의 용안을 흐리게 하여 우리 원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사옵니다. 국력이 약한 우리나라가 고려와 불화를 가져와서는 아니되옵니다”

이 말에 원나라 왕 순제는

“짐도 그리 생각하고 있오”

“최유를 그냥 두어서는 고려와 불화가 생길 것은 자명하오니 최유를 처단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우리가 처단할 것이 아니라 포박하여 고려로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러면 고려에서 최유를 처단할 것이 아니겠오”

“그렇사옵니다. 그럼 촤유를 체포하여 고려로 돌려 보내겠사옵니다”

원나라 왕 순제의 명령에 따라 최유는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되었고, 최유를 넘겨받은 최영은 곧바로 공민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최유는 참형을 당했다.

원나라는 이 때 고려를 침입할 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칫 고려와 불화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오히려 정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원나라의 국력은 쇠약해진 상태였고, 따라서 최유를 고려에 넘겨주는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고려 사회가 계속되는 변란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동녕로 만호 박배야대가 연주를 침입하자 최영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격퇴하시켰고,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자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은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슬픔을 껶었다. 1365년 2월 만삭의 몸이단 왕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계속되던 전란에 지친 공민왕을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 신돈(편조)에게 정권을 맡겨 조정 산하들을 견제토록 한 후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돈의 권력이 막강해졌다. 왕의 후원을 받은 신돈이 일련의 개혁작업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시켜가자, 권문세가들의 반발은 매우 심했다. 그 결과 오인택, 조회고, 김원병 등 많은 공시들이 유배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노비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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