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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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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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공민왕의 능은 현릉으로 개경 근처에 마련되었으며, 1385년 9월 명나라에서 공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인덕왕후를 비롯하여 혜비 이씨, 익비 한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반야 등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반야가 우(瑀)를 낳았다.

노국공주 인덕왕후는 원(元)나라 종실 위안의 딸이며, 본명을 보탑실리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1351년에 시집왔으며, 그해 10월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왕과 함께 개경으로 왔다. 그후 공민왕은 그녀를 숙옹공주에 봉하고 숙옹부를 설치하였다.

그녀는 결혼한 지 8년이 될 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1359년에 후궁을 선택할 것을 건의하였고, 공주도 이에 동의하여 이제현의 딸을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공주는 혜비 이씨에 대하여 심한 질투를 느껴 식음을 전폐하고 누었다. 이 때문에 궁녀들과 내관들이 그녀를 심하게 비방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어렵게 임신하여 1365년 2월에 만삭의 몸이 되었고, 공민왕은 이를 기뻐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렸다. 그러나 난산(難産)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혜비 이씨는 경주 사람으로 부원군 이제현의 딸이었다.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이 없자 대신들은 공민왕에게 명문 가정의 딸로서 아들을 잘 낳을 만한 여자를 왕비로 맞이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1359년 5월 이제현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고, 그녀가 바로 혜비 이씨이다.

그녀는 공민왕의 명령에 따라 홍륜, 한안 등이 여러 왕비들을 강간하려하자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녀의 절개가 워낙 대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자 스스로 삭발을 하고 출가하여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익비 한씨는 종실 덕풍군 왕의의 딸이며, 외가의 성씨를 따랐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 공민왕이 왕비로 맞아들여 익비에 책봉했다. 공민왕은 자식을 얻기 위해 홍륜, 한안 들의 측근 젊은이들로 하여금 왕비들을 강간토록 했는데 그녀는 공민왕의 협박에 이기지 못하여 이에 복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공민왕의 소원대로 아이를 잉태하였다. 이 때 공민왕이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자신의 씨앗으로 속이기 위해 홍륜 등을 죽이려고 하다가 되레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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