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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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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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그는 어린 시절 신돈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 공민왕은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돈(辛敦)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신돈은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능우의 어머니 집에서 아이를 출산한 반야는 1년 뒤에 신돈의 집에 가서 생활하였다. 신돈은 동지밀직 김횡이 보낸 여종 김장을 유모로 삼아 아이를 양육했는데, 1371년 역모죄로 몰려 수원으로 유배되자 공민왕은 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짐은 오늘 특별히 경들에게 할 말이 있소이다. 그동안 경들은 짐에게 자식이 없다고 알고 있을 것이지만 짐에게는 아들이 있음을 알리는 바이오“

하자 백관들은 놀란 얼굴로 공민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민왕은 다시 말을 이었다.

“궁인 한씨와 가까이 하였더니 아들을 얻었소. 짐이 이 사실을 일찍 경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혹여 공주가 태어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는데 막상 아들을 얻고 보니 이 사실을 경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가 없어 오늘 백관들에게 알리는 것이오. 앞으로 경들이 잘 지켜줄 것을 부탁하오”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백관들에게 이 일을 공개하기 전에 이미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알리고 자기가 죽은 후에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인임은 그 말을 듣고 모니노(牟尼奴)를 궁중으로 데리고 와서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겼다.

이 때 공민왕은 문신들을 모아 놓고 모니노의 이름을 고칠 것을 명령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시중(侍中) 경복홍, 밀직제학 염흥방, 정당문학 백운보 등을 불로 의논한 후 왕우에게 강녕부원대군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백문보, 전녹생, 정추 등으로 하여금 왕우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달인 1374년 9월에, 이미 사망하고 없는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것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면서 의아해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중하였다.

더구나 우왕 즉위 후에 한씨에게는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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