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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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0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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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공민왕은 우왕(禑王)의 친모가 반야였지만 궁인 한씨라고 말한 것은 반야가 신돈(辛敦)의 여종이었기 때문에 이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반야가 자신을 우왕의 친모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염려한 공민왕은 이미 죽고 없는 궁인 한씨를 우왕의 친모라고 꾸며서 말한 것이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 세력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씨앗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하지만 1374년 9월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 등에 의해서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인인임 등은 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했고, 이 때 우왕의 나이는 불과 10세였다.

왕우(王禑)를 왕으로 세울 때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는 이를 반대했다. 명덕태후는 공민왕이 죽은 다음날 경복흥 함께 종친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인임은 우(禑)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두 세력 간에 팽팽한 설전(舌戰)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판삼사사 이수산이 나서서 종실에 맡기자고 하였다. 하지만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이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우(禑)를 왕으로 세우데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왕이 등극하자 그를 옹립했던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인임의 신임을 받은 최영도 이때부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등장했다.

우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원(北元)에서는 심양왕 왕고의 손자 탈탈불화를 고려 국왕에 봉했다. 이 때문에 원(元)나라의 장수였다가 명나라에 투항한 나하추는

“공민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누가 왕위를 계승했단 말이냐? 공민왕이 무자식이란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우(禑)가 공민왕의 아들이라니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이건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면서 고려 조정을 힐난하였다.

1375년 8월, 고려 국왕에 책봉된 심양왕 탈탈불화가 즉위식을 갖기 위해 고려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불안에 떨게 되었다. 하지만 이인임이 탈탈불화 일행을 저지하여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리고 1377년 북원(北元)이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 국왕에 봉함으로써 왕위계승 문제는 종결되었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倭寇)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사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령한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 조정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왜구 소탕작전에 나서서 1376년에는 최영이 홍산(논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들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살랐다. 또한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에서 수백 척의 왜선을 궤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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