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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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0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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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이에 우왕(禑王)은 요동정벌 계획을 수립하고 전국 8도에서 대규모 군사를 징집하였다. 또 세자와 왕족들은 모두 한성으로 피난시키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우왕 자신은 최영과 함깨 서해도로 가서 요동을 정벌할 전쟁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며 우왕을 설득하였다. 이성계는 식량이 풍부한 가을이 요동정벌의 적기라고 주장하면서 출병을 반대했지만 최영의 반대로 하는 수 없이 출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동정벌을 주도한 인물은 최영이었다. 최영은 1316년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정성한 뒤에는 조일신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호군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355년에는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인당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서쪽지역을 공격하여 파사부 등 세 곳을 격파하였다.

또 1357년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로 왜구 토벌에 나서 오예포에서 왜선 4백 척을 궤멸시켰으며, 1359년에는 홍건적 4만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하자 이를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덕분에 이듬해에는 서북면도순찰사에 오르고,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개경을 함락하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외에도 1363년에는 김용(金庸)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이듬해에는 최유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처럼 전장을 누비며 출세 가도를 달리던 최영은 1365년 강화도에 침범한 왜구를 막던 중 신돈의 참소로 인하여 경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유배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1371년 신돈이 숙청되면서 다시 소환되어 육도도순찰사에 올라 70세 이상 되는 장정에게는 군역 대신 쌀을 거두어 들이는 등 무리한 병력 보충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사헌 김속명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김속명이 유배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고 이인임의 보필을 받은 우왕이 즉위하면서 조정은 이인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권력을 잡은 이인임이 친원정책을 실시하다가 김구용,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의 탄핵을 받게 되자 최영은 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인임을 편들어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귀양 보내고 권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 후 최영은 1375년에 판삼사사가 되었고, 1380년에는 왜구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해도도통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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