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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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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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하지만 이 때 병을 얻어 개경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던 중에 수시중(守侍中 : 시중 아래의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중앙의 중책의 맡았다.

그리고 1384년에는 마침내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문하시중에 오른 최영은 한동안 판문하부사로 이전하였다가 1388년에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그동안 이인임과 함께 정권을 농단하던 염흥방, 임견미 등을 숙청했다.

이 때 이인임은 정계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경원부에 유배되었다가 최영의 배려로 풀려났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채빈을 사신으로 보내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고 통보를 해 왔다. 더구나 채빈은 오만무례한 태도로 고려가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 돌려주지 않으면 고려를 치겠다는 등 오만 방자한 말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하였고, 고려 조정에서도 요동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였다.

채빈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에서는 채빈을 죽인 값으로 부녀자 1천명, 학생 1천명, 환관(宦官) 1천명, 우마 1천필을 보내야 한다는 등 고려에 대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최영은 대관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우리가 선수를 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전날 고구려의 땅이었던 요동은 현재 비어 있는 상태이니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자 대관들도 그렇게 하기로 결의를 다졌고, 우왕(禑王)도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우왕(禑王)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에 최영,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에 조민수(趙敏修),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에 이성계(李成桂)를 임명하고, 그 밑에 수 십명의 장군과 7만여 명의 군사를 배속시켰다.

1388년 5월 초순에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7만의 군사와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 주둔했다. 그리고 일단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왕과 최영도 안주에 이르러 총지휘를 하고 있었다.

최영은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작전명령을 내려 선봉부대로 하여금 즉시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군사들은 폭우가 쏟아져 불어난 강물 때문에 더 이상 진군(進軍)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우왕(禑王)에게 회군(回軍)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하지만 우왕(禑王)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협의하여 군사를 돌려 회군을 단행했다.

회군으로 사기가 충천한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개경을 향해 진군했다. 이성계의 일파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고려에 대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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