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11 17: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49.

“이번 거사는 나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오.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대의를 저버릴 뿐 아니라 고려가 위태롭고 백성이 원하는바가 아니므로 원한이 하늘에까지 닿았기 때문이오. 나로선 부득이 한 일이었소”

"쓸데 없는 소리다. 옛날 이인임의 말만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텐데...참으로 후회막심하다”

한마디 말이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성계가 곽충보 등 몇 명의 장군들에게 눈짓을 하자 최영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최영은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란 죄목으로 고봉현(고양)으로 유배길에 올랐고, 고향인 고봉현(고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리고 다시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 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날 형장에서의 최영의 태도는 너무도 당당하여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최영이 최후를 마칠 때

“내가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억울한 일을 안했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죽었는데 과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적분(赤墳)이라 불렀다. 최영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모두 문을 닫고 슬퍼하였다. 시체를 버린 곳에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지나갔다.

후에 변계량은 최영의 충성을 기리는 시(詩)를 읊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충성심을 북돋았다.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삼척 동자도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소

한 조각 붉은 마음 영원히 죽지 않아

그 이름 천추까지 태산과 같으리라.

奮威匡國鬢星星 學語街童盡識名

一片丹心應不死 千秋永興泰山橫

한편 궁성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禑王)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는 물론 의관(衣冠)을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했다.

우왕(禑王)이 폐위된 뒤에 그의 아들 창(昌)이 왕위를 이어 받았지만 1년 5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그리고 1389년 12월 신종의 7세손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정당문학 서규형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 우왕의 나이는 25세였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다.

우왕(禑王)은 근비 이씨를 비롯하여 영비 최씨, 의비 노씨, 숙비 최씨, 안비 강씨, 정비 신씨, 덕비 조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 등 9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근비 이씨에게서 창을 얻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