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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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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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고려(高麗)의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善竹橋) 돌다리 위에서 털썩 쓰러졌다.

다리 밑에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방원이 우루루 달려 나와, 넋을 잃고 서 있는 조영규와 나란히 서서 장엄한 충신의 최후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는 66세로 이성계보다 한 살 아래였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 전에 그를 찾아가 몇 번에 걸쳐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것을 권했지만 정몽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버티고 있는 한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조영규로 하여금 마침 선죽교(善竹橋)를 건너고 있는 정몽주를 철편으로 내리쳐 죽였던 것이다.

정몽주는 영일현(迎日縣) 출신으로 정습명(鄭襲明)의 후손 윤관의 아들로 133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이씨가 잉태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 하여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 불렀으며, 호는 포은이다.

성인이 된 뒤에는 몽주로 개칭하고 1357년 21세 나이로 감시에 합격한 후 1360년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장원하였다.

1362년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라 1363년에는 정4품의 합문지후, 동북면도지휘사종사관 등을 거쳐 1367년에는 예조정량으로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이 무렵 주자학에 대한 뛰어난 강설을 펼쳐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의 시조(東方理學의 始祖)’라는 극찬을 받았다.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은 정몽주는 태상소경과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의 학문직에 종사하면서 사상(思想)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 때 풍랑을 만나 일행 중 열 두 사람이 죽었지만 정몽주는 12일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간신히 명나라 수군(水軍)에 구조되었다.

귀국 후에는 경상도 안렴사, 우사의대부 등을 거쳐 1376년에는 학문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하지만 이 해에 이인임, 지윤 등이 중심이 된 배명친원(背明親元) 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난 정몽주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정몽주 이외에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은 많았다. 조의생, 성사체, 박문수, 민안부, 김충한, 이의돈 이른바 두문동 72현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그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杜門洞)으로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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