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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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2.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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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그들은 동네의 동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 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조정은 다시 이성계파가 권력을 잡았다. 그래서 온건개혁파인 김진양, 이호수, 이래, 이감, 권홍, 정희, 김묘, 서견, 이작, 이신, 이숭인, 이종학, 조호 등이 퇴출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반면 정몽주에 의해 유배중이던 조준이 정계에 복귀하여 이성계파를 결집시켰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 세력들에 대한 척결작업에 돌입하여 이청, 이사형, 설장수, 강희백, 유기, 최함 등을 제가하는 한편 6월에 남은파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몽주가 죽고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공양왕의 전도(前途)는 더욱 암담하기만 하였다. 언제 어떻게 이성계의 고혼(孤魂)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의 역사가 이 같은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에 싸인 왕(공양왕)은 목숨이라고 살려는 궁여지책으로 이방원과 조용(趙庸)을 불러 들였다.

“나는 앞으로 이시중(이성계)과 동맹을 맺고자 하오. 경들이 나의 뜻을 이시중에게 전하고 그 말을 들어 맹서(盟誓)를 작성해 오도록 하오. 아마 그런 고사(古事)가 있을 듯싶소”

하며 그들의 의향을 떠 보았다.

조용(趙庸)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예로부터 나라와 나라끼리 동맹하는 일은 있었지만 임금과 신하 사이의 동맹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왕은 조용(趙庸)으로 하여금 서로 동맹한다는 내용의 맹서(盟書)를 작성케하여 동맹을 맺으려고 이성계의 집으로 행차하려 하였다. 밖에서 의위(儀衛)를 갖춘 신하들이 뒤따르려 하였다.

백관들이 서 있는 가운데 미리 연락된 우시중 배극렴이 왕대비전으로 들어가

“지금 왕은 혼미(昏迷)하여 임금의 도리를 잃은지 이미 오래이니 임금의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폐위시키시오”

이 조서를 남은파 정희계(鄭熙啓)가 가지고 왕이 장차 행차하려던 별궁으로 들어가 왕의그동안 여러가지 죄를 논죄하며 우부대언 한상경(韓尙敬)으로 하여금 교서를 읽게 하였다.

다음날 공양왕을 페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한다는 교지가 발표되자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쫓겨나고 이성계(李成桂)는 국왕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 왕국은 개국한지 474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왕씨들은 어머니성을 따르거나 전(全), 옥(玉), 용(龍), 전(田)씨 등으로 성(姓)을 바꾸고 살아야 했다. 또한 왕씨들에게 강화도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자 이를 믿고 왕씨들이 대거 몰려 들자 이들을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하다가 바다에 수장(水葬)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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