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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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 권우상
  • 승인 2020.07.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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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거우위왕은 재위 18년에 전국 각 마을에 열 명의 전투무기 실태 감사를 파견하여 마을 관리들의 비리(非理)나 물품 부정행위를 조사하고 철기문화 정책에 비협조적이거나 전투무기 생산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는 관리는 파직하는 조치를 했다. 특히 백성들은 착취하는 관리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했다. 또한 철기문화 정책과 지방 관리들의 결탁을 파악하기 위해 거우위왕은 직접 암행 관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기문화 정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쟁준비로만 보이지만 거우위왕의 궁극적인 목표는 철(鐵)을 이용한 다양한 생활용품 진흥을 수단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이런 성과는 특히 국방분야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거우위왕은 재위 20년에 자타국(창녕)이 다라국(多羅國) 변경을 침입하자 즉각 군사를 출동시켜 자타군(창녕)을 퇴각시켰고, 재위 21년에는 가소성(경남 거창지역)에 성을 신축하였다. 이 두 성을 신축한 것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타국(창녕)의 침략에 대비하고 동시에 백제와 그들 나라를 침입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가소성(거창)에서 소백산 줄기의 육십령만 넘으면 바로 백제의 땅이었고, 백제로서는 마두성(경북 청도)에서 낙동강만 넘으면 다라국(多羅國)의 중심지인 대야(경남 합천)를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거우위왕은 재위 23년에 산반하국(散半下國 : 진주)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 해마다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라국(함안)도 다라국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가끔 두 나라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지만 다라국 거우위왕은 아라국(安羅國)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이유는 아라국(함안)보다 신라(사로국)를 더 경계하였다.

허우위왕 즉위 25년, 신라가 다라국 변경을 침입하자 즉각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을 퇴각시켰고, 가소성(경남 거창지역)과 마두성(경북 청도지역)을 신축하였다. 이 두 성을 신축한 것은 혹여 있을지 모를 백제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고 동시에 그들 두 나라를 침입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가소성(거창)에서 소백산 줄기의 육십령만 넘으면 바로 백제의 땅이었고, 마두성(청도)에서는 낙동강만 넘으면 다라국의 도읍지(합천)를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두 지역에 병력을 증강 배치하여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가라국은 마침내 신라의 영토인 마두성(청도)을 공격했다. 가라국이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으로 신라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병력은 3천여 명이었고, 대부분 기마병이었다. 하지만 가라국의 선제공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신라는 기마병 4천으로 가라군이 마두성으로 진격해 올 지역에 두 갈래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하지만 가라군은 이러한 신라군의 동태를 알지 못하고 마두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당하였다. 결국 가라군은 신라를 먼저 공격하였으나 신라군과 접전을 시작한지 하루만에 가야군은 많은 병력을 잃고 거의 전멸상태로 크게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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