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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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 권우상
  • 승인 2020.07.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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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이때 가라군은 살아서 도망친 자가 겨우 백여 명에 불과 했으니 완전히 패(敗)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라국 수로왕은 자신의 작전 실패를 크게 후회하고 통탄했다. 가라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가라국(김해)의 접경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3천의 기마병을 증강하고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가라국을 더욱 압박하였다. 이는 가라국과 동시에 다라국(多羅國)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군사시위에 위기를 느낀 가라국 수로왕은 어차피 전쟁을 할 바에야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장수 허보(許甫)에게 군사 2천 5백을 주어 신라의 서쪽 변경을 선제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맞서 신라도 3천의 병력으로 가라군과 대적하게 했다. 3천의 신라군과 싸우는 2천 5백의 가라군과의 치열한 접전은 처음에는 막상막하로 싸움이 전개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군은 열세에 몰려 희생자만 늘어나게 되었다. 전황이 가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라 탈해왕은 2천의 기마병을 추가로 신속이 출병시켜 가라군과 싸우는 신라군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신라의 2천 기마병이 합세하자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 가라군은 크게 패하였고 이때 살아서 도망친 병사는 백 여명에 불과하고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군대를 증강하여 이듬해 3월, 대대적인 가라국(김해) 정벌에 나서기로 하고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참에 가라국을 완전히 제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다라국(합천)까지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동태를 파악한 가라국 수로왕은 급히 사신을 신라로 보내어 지금까지 신라를 침입한 일에 대하여 사죄하고 가라국 침략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라에서 가라국 수로왕의 요청을 받아 들여 가라국 침략의 계획을 일단 중지하였다.

신라와 가라국의 잦은 충돌을 눈여겨 본 다라국 거우위왕은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전국에 걸쳐 처음으러 징집(徵集)을 실시하고 힘이 세고 칼이나 활을 잘 다루는 사람은 일정한 기간 군사훈련을 시켜 장수로 임명했다. 이처럼 다라국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안 신라 탈해왕은 장수 석문부(石文夫)에게 3천의 병력을 안겨 가라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라국을 먼저 처 없애야 다라국을 공격하기가 쉽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군을 거느린 석문부는 황산하(지금 경남 양산 원동면 앞을 흐르는 낙동강)를 건너다가 인근 숲속에 매복해 있던 가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포위되는 신세가 되어 신라 병력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이 문제로 탈해왕은 석문부를 파직하고 장수 박차술이 임명되어 이듬해 5천의 기마병(騎馬兵)으로 가라국을 침공했다. 이처럼 신라가 가라국(김해) 정벌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임나십국 중에서 다라국(多羅國 : 합천)이 가장 강성하기 때문에 다라국만 치면 다른 나라는 치기가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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