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명작소설] 술 항아리 속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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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명작소설] 술 항아리 속의 사람들
  • 권우상
  • 승인 2017.11.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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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정대감의 아들 상진은 붓에 먹을 듬뿍 찍어 강만수의 등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전략(前略), 이놈 강만수로 인해서 잃지 않을 책과 돈을 잃고, 잃지 않을 당나귀도 잃었사오니 집에 돌아가거든 즉시로 하인을 시켜 죽여 없애도록 하옵소서. 소자(小子) 상진(相眞) 상서(上書) -

쓰기를 마친 정대감의 아들 상진은 다시 강만수에게 엄히 일렀다.

“집에 돌아가거든 곧 대감을 뵈옵고 네 등에 쓴 글을 보여드려라. 알겠느냐?”

“예, 염려마십시오.”

이렇게 하여 정대감 아들 상진은 한양 길로 떠나고 머슴 강만수는 안동 정대감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 강만수는 한양 구경을 못하게 된 것이 여간 원통한 일이 아니었으나 별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올라올 때보다는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웬지 등에 써준 글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를 칭찬한 글이 아님은 뻔한 일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행인 중에 선비나 글을 알만한 사람을 찾던 강만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자기 쪽으로 향해 오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글을 알겠지 생각하고는 다짜고짜로 스님 앞으로 다가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넙죽 하며 말했다.“스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청인지 말해 보시오.”

스님은 공손히 대답했다.

“이것 좀 봐 주십시오.”

윗저고리를 벗고 등을 보였다.

스님은 등을 보고는

“댁을 죽여 없애라는 글이외다.”

“그러면 돈 닷 냥을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니 이 글을 지우시고 대신 소인이 불러드리는 대로 고쳐 써 주십시오 스님.”

“그리 하옵지요”

스님이 먹과 붓을 준비하자 강만수는 입을 열었다.

“ 전략(前略), 강서방으로 인해서 잃을 책과 돈을 얻었으며, 마땅히 잃을 당나귀를 얻었으니 집에 돌아가는 즉시 기와집 한 채와 논밭을 주어 잘 살게 하여 주옵소서. 소자 상진 상서.. 이렇게 써 주십시오”

“그렇게 쓰겠습니다.”

잠시동안 빙글거리며 웃으면서 등을 돌려댔던 강만수는 스님이 글씨 쓰기를 마치자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스님과 헤어진 후부터 강만수는 기분이 좋아 뛰다시피 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십여 일 후 집으로 돌아온 강만수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정대감을 찾아 뵈였다.

“대감님! 지금 돌아왔사옵니다”

“너 먼저 웬 일이냐?”

“이걸 보시면 아실 일이옵니다.”

다짜고짜로 저고리를 벗고 등을 정대감 앞에 불쑥 내밀었다.

“뭣이? 책과 돈을 얻고 당나귀를 얻었으니 집과 논밭을 주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마땅히 죽었으리라 믿고 일간 강만수의 마누라 옥매를 첩실로 맞아들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집과 논밭을 주라니 모두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물어 본들 거짓을 보태면 보태었지 그 진상을 알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의 말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데야 별 수 없었다.

이날로 정대감은 강만수에게 큰 기와집 한 채와 먹고 남을 만한 논밭을 주었다.

그해 여름이었다. 한양에 갔던 상진이 과거(科擧)에 낙방하고 돌아와보니 집 옆의 큰 기와집에 강만수가 살고 있는데 사연을 알아 보았더니 뜻밖에도 기가 막혔다.

곧 부친께 말씀드리고 힘깨나 쓰는 하인들을 시켜 강만수를 잡아다가 오랏줄로 꽁꽁 묶은 뒤에 두겹으로 된 무명자루에다 집어 넣고 주둥이를 꽉 막아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서 이것을 앞산 밑에 있는 큰 연못에 집어 넣어라.”

정대감의 아들 상진의 분노는 상투끝까지 올랐다.

“네.”

하인들은 강만수를 넣은 자루를 메고 앞산 밑 큰 연못가로 갔다. 강만수는 이제 별도리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누라의 얼굴로 한번 더 보고 싶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큰 연못가에 당도한 하인들은 자루를 내려놓고 난처한 얼굴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여보게, 사실 말이지 강만수야 무슨 죄가 있나. 이것은 다 정대감의 부질없는 생각에서 생사람을 죽이는 거지 뭔가? 정대감댁 도련님이 시키는 일이니 거역할 수가 없어 여기까지 메고는 왔네만 차마 물 속에 던질 수야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저 버드나무 가지에 이 자루를 매달아 놓고 돌아가세”

“그것이 좋겠구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하인들은 큰 연못가 버드나무 가지에 자루를 매달아 놓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강만수가 살아나갈 길은 아직 막연했다. 자꾸만 마누라가 보고 싶었다. 감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적시면서 계속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만 했다. 이리저리 골몰히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사람 하나가 버드나무 밑으로 지나가는데, 지팡이 소리가 나고 발자국 소리가 고르지 못한 것이 필시 장님이 틀림없었다.

바로 이때 강만수의 머리에 묘안이 떠올랐다.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강만수는 마치 염불 외듯 크게 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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