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명작소설] 술 항아리 속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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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명작소설] 술 항아리 속의 사람들
  • 권우상
  • 승인 2017.12.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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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방에서 우홍부의 말을 듣고난 이방원은

“ 하하하. 참으로 자네 아버지는 영특한 사람이구만... 나한테 아들을 보내어 고자질을 하라고 했으니. 하하하 ”

“ 그럼 소인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

“ 자네 아버지한테 전하게... 삼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을 나한테 고자질하여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일세 ”

“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하고 우홍부는 돌아갔다.

“ 방간 형님이 왕위를 노려 나를 죽이려고 모의를 했다니.. ”

하면서 이방원은 이를 부드륵 갈았다. 우홍부에게 방간이 왕위를 노려 이방원을 죽이려고 모의를 했다는 말을 듣고 난 이방원은 내심 분개하여 무장을 갖추어 말을 타고 군사들을 출동시켜 방간에게 쳐들어 갔다. 싸움은 선죽교 근처에서 시작되어 가조가(可祚街)까지 걸쳐 치열하게 싸웠다. 방간은 자기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민유공(閔有功), 이성기(李成奇)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거느리고 수백명의 군사로 싸움에 나섰고, 이방원 편에서는 이숙번이 총지휘하여 양쪽에서 방간 방원이 모두 선두에 나섰다.

형제 싸움인 만큼 구경꾼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었다. 이방원 편의 총지휘자 이숙번은 과거에 방석과의 싸움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지라 왕자간의 싸움은 두 번째인 셈이었다. 말을 타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베고 활을 쏘면서 치열하게 싸움이 전개되었다. 칼에 맞고 창에 찔러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사들이 속속 생겨났다. 군사들의 비명과 아우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처음에는 양쪽 모두 엇비슷한 싸움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방간의 군사들에게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여 전세(戰勢)가 불리하였다. 백금반가(白金反街)에서 방간의 군사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방간 혼자 고전분투 하였다.

그러나 적경원(積慶園) 터에서 방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활까지 내던지며 쓰러졌다. 그러자 이방원의 군사들은 와아 ! 소리를 지르며 몰려들어 방간을 생포하였다. 사로잡힌 방간은

“ 나는 남의 말을 듣다 이 지경이 되었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여생이나마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 ”

하며 꺼이꺼이 울면서 살려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소식이 대궐에 전달되었다. 그러자 왕(정종)은 도승지 이숙(李肅)을 보내어

“ 내낮에 한양거리에서 난을 일으킨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더구나 왕위를 찬탈하고자 방원 아우를 죽이고 변란을 도모한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형제지간의 정으로 보아 귀양을 보낸다 ”

하는 교서를 내렸다. 방간은 왕의 교서를 받고 다음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이방원을 죽이려고 모의한 죄로 강원도 영월로 귀양길에 올랐고 방간의 부하들은 대부분 참형을 당했다.

방간과의 싸움에서 이긴 이방원은 세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힘이 강해지자 왕(정종)은 물론 대신들도 무척 불안한 기색이었다. 왕(정종)은 지금처럼 이방원의 세력이 강하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임금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이방원을 대궐로 불렀다. 왕은

“ 아우님 ! 난 임금자리가 싫으니 이 자리를 대신 아우님이 맡아 주게 ”

이방원은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환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척 하면서

“ 주상께서 그런 허약한 말씀을 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주상을 지켜드릴테니 좋은 국사를 펼치시어 성군이 되십시오 ”

하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웬지 임금자리가 싫었다. 이대로 임금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가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떠올랐다. 임금자리가 마치 가시방석과도 같았다. 왕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 들여 이방원은 그 해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바로 태종이었다. 이방원이 왕이 된 이듬해였다.

길재(吉再)는 충청도 도봉 촌가에 묻혀 후학에 힘을 쏟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 노환이 깊어지자 요양을 하고 있었다. 도봉 촌가는 외삼촌이 살던 집이었다. 왕(이방원)은 길재(吉再)의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듣고 이숙번을 보내어 노환이 어느 정도 깊은지 알아 보라고 했다. 그리고 어의(御醫)를 동행시키고 종명약까지 지어 보냈다.

때는 8월 중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구름이 끼었다하면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이숙번 일행은 한양을 출발하여 이천(利川)과 장호원을 거쳐 앙성을 지나 능암에 왔다. 그러나 길재(吉再)가 머물고 있는 도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목계강(지금의 충주 남한강)을 건너야 했다.

때마침 내리는 폭우로 강이 범람하여 이숙번 일행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일행은 말을 세워놓고 인근 주막에서 잠시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폭우는 계속 쏟아졌다. 길재(吉再)의 병이 위독하여 빨리 건너야 하지만 강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가 여간 어럽지 않았다. 길재에게 빨리 가보라는 왕의 어명도 있고 하여 이숙번은 마을 사람들은 동원하여 큰 통나무를 베어와 뗏목을 엮어 만들어 강에 띄었다.

그러나 물살이 워낙 거세어 뗏목이 자꾸만 하류로 떠내려가 도저히 강을 건너기가 어려웠다. 이때 일행중 헤엄을 잘치는 사람에게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러나 워낙 강물이 범람하여 헤엄을 치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갑자기 흐르는 물결이 정지하더니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나와 밧줄로 뗏목을 강가 나무에 붙들어 메고 끌어 당기면서 이숙번 일생은 겨우 강을 건너 도봉으로 들어가 길재(吉再)의 집에 당도했다. 이숙번은 왕(이방원)이 보내어 왔다고 알렸다. 그리고는 종명약 등 왕(이방원)이 보낸 하사품을 길재(吉再))의 앞에 놓았다. 길재(吉再)는 감격에 목이 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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