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8.12.04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회

왕거인(王巨仁)이 실신(失神)을 하자 그를 감옥에 넣었다.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한 왕거인(王巨仁)은 손가락으로 잇빨을 깨물자 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왕거인은 흐르는 피로 벽에다 다음과 같이 시(詩)를 썼다.

- 우공이 통곡(痛哭)하니 삼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오월(五月)에도 서리가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창창(蒼蒼)하기만 하구나 -

이 시(詩)에서 우공이라고 하는 말은 춘추전국시대 연(淵)나라 태자이며, 추연 역시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시절을 한탄한 인물들이었다. 왕거인(王巨仁)은 자신을 우공과 추연에 빗대어 시(詩)를 지은 그날 밤이었다. 수 많은 별들이 총총하게 빛난 맑은 하늘에 신묘하게도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가득 덮히고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진성여왕이 머물고 있는 대궐에 우박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때 마침 진성여왕은 침실에서 위홍과 음사(淫事)를 끝내고 막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는 소리에 놀란 위홍은 급히 내관(內官)을 불렀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허어.. 이럴 수가... ”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위홍은 진성여왕에게 말했다.

“왕거인을 잡아들려 하늘이 노한 것 같습니다”

“날이 밝는대로 왕거인을 석방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이튿날 왕거인(王巨仁)은 석방되었다. 이 일로 진성여왕은 공포에 질려 가슴이 뛰는 등 병(病)을 얻었다. 그해 여름에는 신라 전역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혹독한 가뭄에 시달려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고(國庫)가 비어 있는 터인데 흉년까지 겹치자 진성여왕은 서둘러 각 지역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非理)와 수탈 행위가 자행되었고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전국 각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산마다 도적이 들끓었다.

이런 와중(渦中)에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신라(新羅) 조정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내마(벼슬) 영기에게 군사를 주고 사벌주(경북 상주)의 반란군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농민군의 세력이 워낙 강하여 영기는 사벌주(경북 상주) 진압에 실패했다. 그런 사이 사벌주 촌주(村主) 우연이 반란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전사했다. 관군이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은 진성여왕은 내마 벼슬 영기에게 반란군 진압을 실패한 책임을 물어 참수하고 불과 열 살 밖에 안된 사벌주 촌주 우연의 아들을 사벌주 촌주로 임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우연의 아들은 반란군을 진압하기는 커녕 사벌주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우연의 아들도 전사했다.

신라(新羅)의 관군이 사벌주(상주)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 지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잇달이 일어났고, 이 기회를 틈 타 지방 호족(豪族)들이 힘을 형성하여 우후죽순처럼 군사를 일으켰다. 특히 사벌주(상주)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세략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豪族)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청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군벌(軍閥)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도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력 외에도 조직의 무리를 형성하여 그야말로 도적질을 일삼는 무리들 중에도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무리가 붉은 바지를 입고 도적질을 일삼는 ‘적고적’이었다.

군벌(軍閥)은 비단 이런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 조정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관리들마저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지방 군벌(軍閥)로 대두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다 보니 신라 조정에서는 반란군 진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방의 군대를 차출하여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지만 지방관리들이 조정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라벌(徐羅伐)을 수비하고 있는 경군(輕軍)으로 반란군을 모두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지역 군벌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뒤로는 신라 조정의 힘은 겨우 서라벌(徐羅伐)만 붙들고 있을 정도로 국력은 급격히 쇠락(衰落)해 가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