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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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8.12.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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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이러한 틈을 타서 지방 호족(豪族)들은 자기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날이 갈수록 왕실에 도전하는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진성여왕은 헌강(憲康)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定康)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정강왕 역시 재위 1년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서기 887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앉아 있긴 했으나 실제로 왕권을 쥐고 있는 인물은 위홍이었다. 위홍은 경문(景文)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이고 남편이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위홍에게 정사(政事)를 맡겨 국가 대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위홍에게 아첨(阿諂)하지 않는 신하는 가차없이 내쫓고 위홍에게 아첨하는 간신(奸臣)들이 조정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더 가중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위홍은 진성여왕 즉위 이듬해인 888년 2월에 죽고 말았다. 위홍이 죽자 지도력을 상실한 조정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노려 지방 호족들은 노골적으로 왕실에 도전하는 각가지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거기다가 진성여왕은 위홍의 죽음으로 심한 자괴감에 빠져 젊은 남자들을 궁궐로 불러 들여 침실에서 음사(淫事)를 즐기는 데 열중했다. 진성여왕이 색욕(色慾)에 빠져 들도록 부추긴 인물은 유모(乳母)였던 부호부인이었다.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이 성욕(性慾)에 강하다는 것을 알고 젊은 남자들을 여왕에게 붙여주고 여왕이 젊은 남자와 침실에서 음사(淫事)에 빠져 있는 사이에 권력을 독점하여 온갖 횡포를 부렸다. 심지어는 뇌물을 받고 여왕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청하기도 했다.

특히 여왕에게 붙여주는 젊은 남자들 중에는 체격이 건장한 화랑(花郞)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여왕과 관계를 맺은 자들은 여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기강이 무너져 신하들은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진성여왕이 음사(淫事)를 즐긴 젊은 남자 중에는 효종랑(孝宗郞)이라는 화랑이 있었다. 효종랑은 얼굴이 잘 생긴 미남일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학덕이 높아 그를 따르는 낭도들이 많았다. 그래서 진성여왕은 어느 누구보다도 효종랑을 총애하였다.

어느해 봄 효종랑(孝宗郞)이 포석정에서 여러 낭도들과 함께 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낭도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효종랑을 찾아 왔다. 두 낭도의 눈물을 본 효종랑은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오?”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서럽게 울더니 한 사람이 대답했다.

“오는 길에 너무 안타까운 일을 보게 되어서 그만....”

효종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잠시후 겨우 눈물을 거둔 낭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희 둘이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조그마한 민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집 마당에서 눈먼 어머니와 그 딸이 서로 부둥껴 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얼마 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비록 어린 몸이지만 남의 집에 품을 팔아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며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는 딸 이름은 은지(恩知)라고 했다. 은지(恩知)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 대가는 겨우 어머니와 함께 지어 먹을 수 있는 저녁 밥 한끼 정도의 곡식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은지는 어머니에게 밥 한끼라도 지어 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이 끝나면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셨다.

앞을 보지 못해 집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는 은지(恩知)의 어머니는 어린 딸이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자신마저 없으면 은지(恩知)가 외톨이로 남게 된다는 생각에 눈물을 감추면서 억지로라도 밥을 먹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은지(恩知)는 다행이 그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부잣집에서 허드렛일을 할 수가 있었고 품값도 훨씬 나아져 하루 세끼 밥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은지(恩知)는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꼭 어머니의 아침 밥상을 챙겨 드렸고 점심 때도 잠깐 집에 와서 어머니의 점심상을 보아 드렸다. 그리고 일하는 부잣집에 어쩌다 잔치라도 있어 맛 있는 음식을 얻게 되면 자기는 입도 대지 않고 그대로 어머니에게 모두 갖다 드렸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은지(恩知)는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은지(恩知)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불편했다. 하루 세끼를 먹게 된 것이나 은지가 좋은 음식을 가져오는 날이면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실정의 은지(恩知) 어머니였기에 내색을 하지 않고 지냈지만 갈수록 입맛이 없어지고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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