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8.12.19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4회

“이 두분은 신라의 무사였는데 이번에 우리 군영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저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 쪽은 거타지라 하는데 궁술의 일인자이고 이 쪽은 연추하고 하는데 창술의 일인자입니다. 앞으로 이 두 사람은 우리 군영에서 적과 싸우는데 중요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고 나서 거타지와 연추에게

“궁예 장군께 인사를 올려라!”

하자 거타지는

“거타지라 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자 연추도 허리를 굽혀

“연추라 합니다”

하고 예의를 표시했다. 궁예(弓裔)는 만족한 듯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궁예는 연추(淵酋)의 미모에 마음이 쏠리는지 탐욕스러운 눈길로 연추의 얼굴을 바라보며

“참으로 미모가 출중하구만...이렇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수가 되다니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만..”

하자 왕건(王建)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연추의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신라 관가에 잡혀 갔는데 거타지가 진범을 잡게 되자 연추의 아버지는 풀려나게 되었고 이 일로 연추의 아버지는 자기의 누명을 벗겨준 거타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거타지를 사위로 삼아 이 두 사람은 부부 인연을 맺게 되었답니다. 두 사람이 신라를 탈출하여 우리 군영에 들어 온 것도 신라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예는

“으음. 그랬구만...왕장군이 두 사람을 잘 키워 보라!”

하였다. 궁예(弓裔)는 청길, 원회, 신훤 등이 항복하자 송악(松嶽)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다. 이 때가 901년이었다. 개국한 궁예(弓裔)는 꾸준히 죽령까지 신라 땅을 잠식하여 영토를 확대해 가면서 남쪽에서 후백제를 세워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견훤(甄萱)과 세력 확대를 위한 전쟁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관제(官制)를 대폭 개혁하여 독창적인 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철원은 산악지대인 데다가 백성의 숫자가 적어 궁예(弓裔)는 매곡(청주)에 사는 일 천호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런 일로 매곡성(청주) 백성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궁예(弓裔)는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하지만 궁예와 신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궁예는 많은 신하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어 죽이기를 예사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반발하는 호족들과 맞서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참수했다. 갈수록 호족들과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면서 궁예는 반발 세력에 대한 가흑한 정책을 일삼았고 그에 따른 불안감도 깊어져 궁예는 자연스럽게 역모(逆謀)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듯 궁예(弓裔)가 역모에 대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어느날 왕창근(王昌根)이라는 상인은 묘한 내용의 글이 새겨진 거울을 들고 궁예를 찾아 왔다.

“소인은 왕창근이라 하는 장사꾼이옵니다”

“그래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궁예가 묻자 왕창건은 거울을 내보이며

“폐하 ! 이 거울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사온데 하도 기이하게 생각되어 폐하께 보이려고 한 것이옵니다 ”

“거울에 글자라니..”

하며 궁예(弓裔)는 거울을 들어다 보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