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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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8.12.3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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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이 전쟁에서 궁예는 양길의 군사에게 위기에 몰렸으나 왕건(王建)이 군사를 이끌고 와 양길의 군사들을 격파하자 궁예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양길은 크게 패하여 도주했다. 그러자 궁예(弓裔)는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으나 그후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신라(新羅)의 국토는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의 삼국으로 분할되었고 신라는 점점 국력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군대와 싸울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자 국력이 허약한 신라를 옆에 두고 견훤과 궁예는 후백제와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내걸고 서로간에 패권(覇權)을 다투고 있었다.

견훤(甄萱)은 사벌주(상주) 가은현 사람이며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년(867년)에 태어났는데 본래의 성은 이씨였고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고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벌주(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신라 진흥왕의 왕비 사도의 시호는 백승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고 선품의 아들 각간 벼슬의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삼아 각간 원선을 낳았는데 이 분이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남원부인이고, 그들에게서 아들 다섯, 딸 하나를 얻었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萱)이고 둘째 아들이 능애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요, 넷째 아들이 보개요, 다섯째 아들이 소개요, 맏딸이 대주 도금이다.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는 신라 신하 진흥왕의 왕비 혈통이지만 진흥왕의 자손이 아니라 진흥왕이 죽고난 뒤에 백승부인이 이씨에게 재가하여 낳은 셋째 아들 구륜공의 후손이다. 하지만 구륜공의 후손은 몰락하여 귀족 신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농부로 살았다.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가 사벌주(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도 귀족 신분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견훤(甄萱)은 성장하여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경도(서라벌)에 들어 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잠을 잘 때에도 늘 창을 머리에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 보다 앞장 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비장(裨將)으로 지내던 견훤(甄萱)은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벌주(상주)를 장악하고 군벌을 형성하자 사벌주(상주)로 돌아와 한동안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얼마 후 신라 도성(서라벌) 주변에서 많은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아자재보다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890년에는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전남 광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신라 서면 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 사행 전주 자사 겸 어사 중숭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호>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92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었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싸움에 신라 조정은 마땅한 대책은 커녕 강 건너 불을 보듯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라는 이미 이들을 제압할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방 성주(城主)들에게 함부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지키라는 수성전을 명령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성전은 커녕 날이 갈수록 신라의 성주들 중에는 궁예 쪽이나 견훤 쪽으로 투항하는 성주들이 늘어나고 있어 신라 조정에서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견훤(甄萱)은 일선(경북 선산)까지 밀고 들어와 세력을 확대하여 주변의 10여 성을 모조리 집어 집어 삼키자 신라 조정의 대신들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우왕좌왕하면서 국정 수행에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패망할지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견훤(甄萱)이 세력 확대에 열을 올리자 궁예(弓裔)도 그냥 있을 수 없다는듯 세력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궁예는 직접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아자개(견훤의 아버지)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사벌주(상주)와 안동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왕건은 5천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견훤의 영토인 진도와 고이도를 치기 위해 군사를 송악 해안가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궁예가 사벌주(상주)와 안동 일대를 점령하면서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 견훤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리자 신라의 경도(서라벌) 주변은 견훤의 군사와 궁예의 군사들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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