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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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0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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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이렇게 궁예가 서라벌 주변에서 견훤의 군사들과 전쟁을 하는 사이 수군대장으로 임명된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5천의 수군(水軍)을 1백척의 병선에 나누어 태우고 나주를 향해 출전했다. 그러나 이 때 견훤은 신라를 치기 위해 서라벌로 향하고 있었고 먼저 대야성(합천)을 공격했으나 신라 장수들이 맹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열흘동안이나 혈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 때 왕건(王建)이 나주를 치기 위해 출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甄萱)은 대야성(합천) 공격을 포기한 채 급히 나주로 향했다.

그러나 견훤(甄萱)이 나주에 도착하기 전에 왕건(王建)은 이미 나주를 쳐서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주변 해상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이 때가 909년이었고 견훤(甄萱)은 왕건에게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왕건의 군사와 총력전을 펄쳐 나주를 맹렬히공격하였고, 열 이틀동안 나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건이 이끄는 수군(水軍)의 기습을 받아 견훤의 군사는 크게 패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견훤은 많은 군사를 잃고 결국 왕건(王建)이 장악한 나주를 포기한 채 울분을 삼키며 완산주로 돌아 갔다.

그리고 당분간 신라 공격의 계획도 보류되었다. 왕건의 수군(水軍)이 나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때까지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개의 주(州)와 현(縣)이 궁예에게 투항했다. 910년 견훤은 나주 수복전에 나섰다. 이 때 왕건은 철원에 머물고 있었고 견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주의 궁예 군사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견훤이 3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나주성을 급습하여 포위하자 나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나주 앞바다를 견훤의 수군(水軍)이 장악하는 바람에 나주와 송악(개성)간의 뱃길이 끊길 정도였다.

그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급히 왕건에게 나주를 구하도록 명령했다. 왕건은 풍덕 앞바다에서 출정식을 거행하고 3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진도를 향해 출전했다.

왕건(王建)이 첫 공격지로 진도를 삼은 것은 견훤의 수군(水軍) 본부가 진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에서 한 차례 격전을 벌린 왕건(王建)은 견훤(甄萱)의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곧 나주 앞바다로 거슬러 올라 고이도에 진지(陣地)를 구축했다. 이때 나주 앞바다는 견훤의 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견훤은 자신이 직접 수군을 지휘하였고 견훤의 전함(戰艦)은 목포에서 덕진포 앞바다까지 종횡으로 늘어선 채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세(戰勢)로 보나 병력으로 보나 단연 견훤의 군사가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왕건의 해상 전술은 견훤보다 확실히 앞질러 탁월했다. 견훤의 군사들은 함선과 병력이 숫자적으로 모두 앞선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왕인 견훤이 직접 지휘를 맡은 상태였기 때문에 견훤의 군사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다. 왕건(王建)이 지휘하는 군사들은 견훤(甄萱)의 군사들의 사기에 눌려 지레 겁을 먹은 상태였다. 왕건 휘하의 장군들까지도 두려운 낯빛을 드러내며 은근히 물러날 것을 왕건에게 청했다. 그러자 왕건은 이렇게 말했다.

“근심하지 마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모든 군사들이 얼마나 힘을 모아 일치 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가 힘을 모아 적과 싸워야 한다. 내가 앞장서 싸울터이니 모두 힘을 일치시켜 싸우기를 바란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왕건은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왕건의 눈에 보이는 견훤의 수군(水軍)은 숫자만 많을 뿐 대오(隊伍)는 허술하고 전술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왕건은 빠른 배를 이용하여 적의 대오를 무너뜨린 뒤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火攻 : 화살에 불을 붙여 공격함)을 퍼붓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런 왕건의 전술을 알지 못한 견훤은 병력이 적군보다 많아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자만심 때문에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다가 500여 명의 병력과 많은 전함이 불에 타 잃고 후퇴했다. 결국 왕건(王建)은 견훤(甄萱)의 허술한 대오(隊伍)를 무너뜨리며 무섭게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견훤의 수군(水軍)은 크게 참패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궁예(弓裔)는 영토와 군사력면에서 견훤(甄萱)을 앞지르게 되었다. 궁예와 견훤이 전쟁을 하느라 나라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있는 가운데 신라 진성왕은 최치원이 상소로 올린 시국에 관한 의견 10조목을 받아 들이고 최치원을 아찬 벼슬로 삼아 조정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헌강왕은 서자(庶子) 요를 태자로 삼아 왕실의 기강을 새롭게 다잡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미 신라의 조정은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있었고 게다가 진성왕도 병에 걸려 더 이상 살 가망이 없게 되자 신라 조정은 비통에 빠졌다. 결국 신라 진성왕은 서자(庶子) 요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6개월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북궁(北宮)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897년 1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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