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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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0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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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제3장

진성(眞聖)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52대 왕으로 등극한 효공왕(孝恭王)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이며 후비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요는 출생한지 석달 밖에 되지 않아 강보(襁褓)에 싸인 갖난 아기였다. 요의 나이가 열 살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왕이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진성왕은 병에 걸려 눕게 되자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요가 헌강왕의 서자라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후비로 맞이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나섰다가 길가에 있던 한 여인을 보자 마음에 들어 뒷 수레에 태워 궁궐로 오는 도중에 행재소(왕이 잠시 머무는 곳)에서 성관계를 하여 얻은 아들이었다. 여인이 요를 낳고 성장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성왕은 요를 불쌍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궁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손으로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이 아이의 등에 뼈가 솟아 있으니 헌강왕의 아들이 분명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서 요를 태자로 삼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진성왕은 신하에게 명령하여 예를 갖추게 하고 요를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후비가 아닌 여자의 몸에서 낳은 자식을 태자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반대하는 신하도 있었다. 하지만 진성왕은 이러한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를 태자로 삼았다.

왕위에 오른 효공왕(孝恭王)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上大等), 아찬 계강을 시중(侍中)으로 삼아 국정을 새롭게 꾸렸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지 3년인 899년 3월에 이찬 박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박예겸은 헌강왕 재위 때 대아찬의 벼슬로 시중(侍中)을 지낸 인물이었다.

효공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신라의 조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898년에 궁예는 북쪽 지역에서 패권(覇權)을 형성하고 있었고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호족 왕융(王隆 : 왕건의 아버지)이 궁예의 세력권에 들어가기를 원하자 이들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삼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처럼 남쪽과 북쪽에서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신라땅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효공왕은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르지 색욕에만 빠져 밝은 대낮에도 여첩(女妾)의 치마폭에 싸여 음사(淫事)를 즐기고 있었으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나라가 존폐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매일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음사(淫事)를 즐기는 데만 열중인 효공왕(孝恭王)을 보다 못해 박은영은 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간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지금 북쪽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국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으며 서쪽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우리 신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사옵니다. 이런 처지에 폐하께서는 어찌 여자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옵니까. 하루 속히 여자를 멀리하시고 정사에 몰두하심이 좋은 줄로 아옵니다. 소신의 진언을 받아 들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효공왕은

“그렇다면 날 보고 그들과 맞서 전쟁이라도 하란 말이냐? 그들과 전쟁을 한들 우리 신라가이기지 못할 것은 뻔하지 않느냐? 우리 신라는 그들과 맞서 싸울 군사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이대로 지켜 보고 있는 도리밖에 무어가 있느냐 ?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그런 방법이 없다면 물러가 있거라”

박은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전(御前)을 물러 나왔다. 효공왕은 늘 색욕(色慾)에만 빠져 있었다. 그러자 박은영은 울분을 참지 못해 효공왕의 애첩을 죽이고 효공왕까지 죽여 버렸다. 박은영은 그의 일파와 왕비가 함께 공모한 후 자객을 내전으로 보내어 효공왕과 애첩을 단칼에 죽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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