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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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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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왕륭(王隆)은 도선(道詵)이 주는 봉투를 받아 백번 절하고 도선이 지시하는 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부터 열 달이 되던 날 아들을 낳았다. 왕륭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지었다. 이 때가 877년(정유년) 1월이었다. 그후 왕건이 7살이 되었을 때 도선(道詵)이 다시 송악산을 찾아왔다. 왕건을 찾아 온 도선(道詵)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혼란한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자리에서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창생들을 당신이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지혜롭게 잘 극복해 나가면 반드시 천자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도선(道詵)은 그렇게 말하면서 왕건(王建)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병법, 전쟁에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때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 일로 인해 도선은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만한 도량이 있었다.

옛날에 자칭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부르며 백두산으로부터 전국 산천을 유람하고 다니던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호경은 전국을 떠돌다가 부소산 왼편에 자리잡은 산골마을에서 장가를 들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호경(虎景)은 체격이 우람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활을 잘 쏘았고 집안도 부유한 편이었는데 아들을 얻지 못해 사냥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경(虎景)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함께 근처에 있는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돌아오지 못하고 굴속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굴로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 들어 입구를 막고 울부짓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들 중에 한 명의 목숨을 호랑이에게 바치기를 결심하고 각자의 모자를 벗어 던지기로 하였다.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모자의 주인이 희생양이 되기를 한 것이다. 열 사람이 일제히 모자를 던지자 호랑이는 호경(虎景)의 모자를 덮석 물었다. 그래서 호경은 약속대로 굴 밖으로 뒤쳐나가 호랑이와 싸울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굴 입구를 막고 있던 호랑이는 호경이가 굴을 뛰쳐나가자 곧장 달아나 버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호경은 호랑이가 자신들은 잡아먹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무너질 위기에 놓인 굴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을 내려 온 호경(虎景)은 평산군청에 가서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이 매몰되어 죽은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는 호경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몰사한 사람들의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낼 때 산신(山神)에게도 제사를 지냈는데 그 때 흘연히 산신이 호경(虎景) 앞에 나타났다.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나는 홀로 산을 주관하는 과부라오. 다행히 성골장군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하고는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간청했다. 이렇게 하여 호경은 산신과 부부가 되어 산의 대왕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호경(虎景)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호경(虎景)이 산신(山神)과 결혼한 것을 안 평나군 사람들은 그들 대왕으로 섬기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아홉 사람이 함께 죽은 그 곳 산 이름도 구룡산이라고 고쳤다. 하지만 그 후에도 호경은 옛 아내를 잊지 못하여 항상 아내의 꿈에 나타나 그녀와 동침하였고 그러던 중 아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강충이라 하였다. 강충은 자태가 단정하고 재주가 비범하였다. 강충은 서강(개성의)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에게 장가 들어오관산 마가갑에 살았다. 이때 풍수지리에 능통한 신라의 감간(지방관) 팔원이라는 사람이 부소군을 방문하였다.

팔원은 강충에게 말하기를

“부소산의 형세가 좋지만 나무가 없는 것이 흠입니다. 그러니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하면 삼국을 통일할 왕이 태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부소군은 원래 산 북쪽에 있었는데 강충은 팔원의 말을 믿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무를 심고 지명(地名)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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