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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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2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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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광종(光宗)은 956년에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公服)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 때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했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관복을 네 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했다.

관복(官服)을 제정한 광종(光宗)은 곧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로 개칭했다. 또한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했다.

이는 곧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즉 자신을 중국의 형제와 같은 위치에 올려 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 권력자임을 모든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光宗)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였고 광종(光宗)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한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갔다.

광종(光宗)의 정치개혁에 반대하여 난동을 부리는 자는 참수(斬首)하고 벤 목은 저자거리에 내걸기도 하였다. 또한 사람을 달구지에 밧줄로 메어 끌고 다니면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참혹하게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종(光宗)의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개혁에 반대하는 호족들이었다.

광종(光宗)의 이 같은 과감한 왕권(王權) 강화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호족 세력은 서로 힘을 합쳐 무리를 지어 조직적으로 대항하며 계속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광종(光宗)은 근위병(近衛兵) 수를 대폭 늘이고 정보망을 통해 호족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난동을 부리면서 근위병(近衛兵)에게 도전하거나 반란의 징후가 포착되면 곧바로 역모로 간주하여 그들을 잡아다가 투옥하거나 죄가 무거우면 가차없이 참수했다.

급기야 역모(逆謀)와 관련된 고변(告變)이 들어오자 광종(光宗)은 또 다시 호족에 대해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호족 숙청의 시발점은 960년 펑론서사(評農書史 : 농업과 관련된 소임을 맡고 있는 관리) 권신이 대상(벼슬) 준홍과 좌승(벼슬) 왕동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면서 피의 숙청에 불이 붙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광종(光宗)은 크게 분노하여 엄단하라고 어명(御命)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대상(벼슬) 준홍과 좌승(벼슬) 왕동은 귀양을 갔고, 광종(光宗)의 주변 인물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역모에 관련된 첩보 수집에 열중했다. 준홍과 왕동을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 것은 준홍과 왕동의 배후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준홍과 왕동을 죽일려고 했으나 준홍과 왕동을 옹호하는 신하들이 참수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귀양을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광종(光宗)에게 간청하는 바람에 왕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 들였다.

준홍과 왕동이 쫓겨나면서 50여 명의 관료들이 쫓겨났는데 이들은 준홍, 왕동과 함께 광종(光宗)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종(光宗)의 피의 숙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혜종(惠宗)의 아들 홍화군과 정종(定宗)의 아들 경춘원군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세자인 주(伷 : 경종)을 의심할 정도로 호족(豪族)들의 역모(逆謀)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처럼 광종(光宗)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면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숙청을 감행했다.

964년 여름 조정은 또 다시 피비린내에 휩싸였다. 태조(왕건) 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수경 일가를 몰락시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박수경의 큰 아들 승위는 좌승(벼슬), 둘째 아들 승찬은 승선(벼슬), 셋째 승례는 대상(벼슬)의 위치에 올라 조정내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종(光宗)의 개혁정치에 반대하는 발언을 측근과 나누다가 첩보망에 걸려 광종(光宗)에게 보고 되었고, 이에 분노한 광종(光宗)은 박수경 일가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결국 박수경 일가는 철퇴를 맞았다.

박수경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태조(왕건)의 충직한 부하였다. 그의 가문은 황해도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평산 박씨를 대표하며 세 명의 후비(后妃)를 배출했다. 또한 왕식렴과 더불어 정종(定宗)의 집권을 후원했고 광종(光宗)의 즉위를 적극 지원한 공로도 있었다.

그런 박수경의 세 아들이 참수되자 박수경은 시절을 한탄하면서 홧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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