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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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6.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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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최충헌(崔忠獻)을 상장국 주국에 올리고, 최충수와 박진재, 조영인, 기홍수 등의 측근들은 각각 응양군대장군, 형부시랑, 판이부사, 판병부사 등으로 기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최충헌 세력은 병권과 인사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고 금(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이 바뀐 사실을 통보하고 표문(表文 : 왕에게 올리는 글)을 보냈다. 금나라에서는 찬탈의 의혹이 있다면서 몇 번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崔忠獻) 등이 명종(明宗)은 요양차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을 걸어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신종(神宗)은 가까스로 금(金)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종(神宗)은 유명무실한 왕이었다.

조정 대소사(大小事)의 모든 정책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래서 왕(신종)은 결정된 사항에 도장이나 찍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최충헌(崔忠獻)은 우봉 사람으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이며, 초명은 란이었다. 음서로 처음 벼슬에 올랐고, 1174년에 발생한 조취총 반란 때 공을 세워 출세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후 여러차례 승진하여 섭장군에 올랐다.

최충헌(崔忠獻)은 아우 최충수와 함께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새 궁궐에 들어가면 화를 당한다는 풍설 때문에 좁은 옛 궁궐에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왕이 새 궁궐로 이어(移御)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토지 관리 및 인재 등용에 관한 개혁안이 봉사 10조의 중심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말만 그럴듯할 뿐 최충헌(崔忠獻) 세력 스스로가 이 개혁안에 위반되는 행동을 일삼으로써 어떠한 개혁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권력에만 눈이 멀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내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비를 쫓아내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충헌은 즉시 최충수에게 달려가 그를 만류하여 꾸짖었다.

“지금은 우리 형제에게 일국의 세력이 집중되고 있으나 우리는 한미한 가문인데 만약 딸을 태자비로 넣는다면 백성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부부사이의 정은 뿌리 깊은 법인데 결혼한지 이미 오래되어 태자와 정이 깊은 태자비를 쫓아내는 일이 인정상 가능한 일이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앞 수레가 전복되면 뒷 수레가 경계한다고 했네. 이의방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나서 끝내 남의 손에 죽었지 않는가? 그런데 자네는 지금 와서 그 전철을 밟으려 하니 아닐 될 말이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최충헌(崔忠獻)의 설득에 최충수는 딸을 태자비로 넣는 것을 단념했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 일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최충헌은 최충수의 딸이 입궁하지 못하게 하라고 수하 장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최충수는 최충헌의 수하 장졸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했고, 이 말을 들은 최충헌은 외조카 박진재와 힘을 합쳐 최충수를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최충헌(崔忠獻)이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몰고 온다는 소리를 들은 최충수는 항복할 생각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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