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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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6.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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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하지만 그의 수하 장졸들이 끝까지 싸우자고 하여 결국 두 형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힘이 약한 최충수는 얼마동안 싸우다가 도주했고, 최충수의 수하 장졸들도 모두 달아났다. 하지만 최충수는 뒤쫓아간 최충헌의 수하 장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최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충헌은 생포하지 않고 죽인 부하들을 심하게 원망하였다. 하지만 이미 최충수의 목이 잘린 마당에 그 같은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최충헌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할 뿐이었다.

또한 외조카 박진재의 세력이 자신 못지 않게 커지자 최충헌(崔忠獻)은 수하 장졸들을 시켜 체포해 온 박진재의 양쪽다리 발목을 잘라내고 유배시켜 버렸다.

발목이 잘리면서 박진재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최충헌을 원망하면서 고함을 질렀으나 양쪽 발목이 잘린 박진재는 유배되었다가 두달 후에 죽었다.

최충헌(崔忠獻)은 이처럼 세력을 키우는 자가 있으면 혈육도 그리고 친척도 가차없이 죽이는 잔인한 모습을 보이며 공포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최충헌은 반란을 우려하여 항상 3천여 명 이상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평상복으로 대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고, 자신의 안방에서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왕에게는 그 결과만 알리거나 알리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부 원로 대신들이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최충헌은 1199년 6월 평장사 최당, 우술유 등을 치사(致仕 : 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케 하여 본인들의 청원(請願) 없이 20여 명의 원로 대신들을 강제로 퇴출시켰다.

이 같은 최충헌의 권력 독식은 고려(高麗) 사회를 극도로 부패시켰고, 백성들은 권력층의 횡포와 굶주림에 더욱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러면서 명종(明宗) 대에 시작된 민란(民亂)이 곳곳에서 발생하여 온 나라가 마치 전쟁터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1198년에는 최충헌의 종 만적이 최충헌(崔忠獻)의 권력 남용을 보다 못해 6명의 친구들과 반란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들은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땅에서는 경인년(정중부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시기만 잘 만나면 누구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벼슬이다. 우리들도 어찌 회초리 아래에서 뼈 빠지게 천한 일만 하겠는가! 우리도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싶다. 아니 그런가?”

그러자 노비(奴婢)들은

“옳소!”

하고 모두들 박수을 쳤다.

만적은 개경(開京)의 노비들이 모이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거사일(擧事日)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거사일에 모인 노비(奴婢) 숫자는 4백여 명 밖에 되지 않아 거사(擧事)는 차후로 미루어졌다.

그들은 다시 보제사 사찰에 집결하여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는데 그만 육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한충유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부터 최충헌은 개경(開京) 전역에다 수하 장졸들을 배치하여 백성들의 행동을 감시토록 했으며, 궁궐에 들어갈 때에도 수백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다녔다. 반란으로 인한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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