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7.24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9.

거란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상장군 노원순을 중군(中軍) 병마사로,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右軍) 병마사로,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後軍) 병사마로 임명하고 총 3만의 군사로 거란군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다.

하지만 3만의 고려군은 전쟁이 시작되자 밀려드는 4만의 거란군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지 못했다. 더구나 거란군은 기마병으로 편성된데 반해 고려군은 기마병과 보병으로 편성되어 있어 기동력이 우수한 거란군을 대항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후군(後軍) 병마사 김취려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중군(中軍)과 우군(右軍)의 고려군이 무너지는 바람에 결사적인 고려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에게 밀려 개경 근처까지 후퇴하였고, 가란군은 혜종의 순릉을 도굴하고 원주와 예천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진나라(동진) 그리고 금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거란군 격퇴를 위하여 연합군 형성을 요청하였다.

몽고, 동진, 금나라가 이에 동의하였고, 몽고와 동진의 군사 2만이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금나라가 군사 1만을 보내어 총 군사 3만의 연합군이 회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무너뜨리고 거란의 본거지인 강동성으로 진격하자 김취려와 조충이 이끄는 고려군도 연합군(몽고. 동진. 금나라)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거란군은 한달동안 버티다가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때가 1219년 1월이었다. 거란이 항복하자 몽고의 원수 합진은 고려에 강화를 요청하였고,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 들여 몽고와 고려는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그 후 합진은 몽고로 돌아가면서 수하 50여 명을 의주에 남겨 두었고, 이 때문에 고려 전역에는

“가을에 몽고군이 다시 우리나라에 온다”

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