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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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7.2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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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또한 몽고군과 동진군은 변방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고려에 대해 조공을 바치라고 독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 사회에는 여전히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渦中)에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의 병이 악화되었다. 이 때가 1219년이었다. 최충헌이 병이 들어 눕자 후계권을 놓고 최충헌의 아들 최이와 최향이 다툼을 벌였다.

최충헌의 측근인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철, 낭장 김덕명, 이가한 등 5명이 최이를 죽이고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김덕명의 밀고로 발각되어 되레 최이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이(崔伊)에게 모의를 밀고한 김덕명을 제외한 4명의 장수와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 모두 40여 명이 남해의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그해 9월 최충헌이 죽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실권은 최이에게 넘어갔다.

최이(崔伊)는 정권을 장악하자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여 빼앗은 전답과 가택 및 물품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문신(文臣)의 등용 폭을 넓혔다.

그 해 10월 의주 별장 한순이 낭장 다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한순은 기 후 구주, 연주, 성주, 안북도호부 등을 제외한 북쪽 변방에 있는 성(城)을 대부분 장악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장군 이극서, 이적유, 김취려 등을 병마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고, 정부군에게 밀린 한순은 다지와 함께 금(金)나라의 원수 우가하에게 투항하였다.

하지만 우가하는 한순과 다지에게

“우리 금나라는 두 장군을 살려 둘 수는 없다. 만일 두 장군을 우리 금나라에서 받아준다면 고려국과 외교적인 마찰이 생길 것이다. 두 사람 때문에 우리 금나라가 골치 아픈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수하 장군에게 그들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금나라의 원수 우가하의 명령에 따라 한순과 다지는 참수되었고, 그의 수급(首級)은 사신을 통해 고려에 전달되었다.

또한 1221년 1월에 한순의 수하 장수 윤장 등 4명이 체포됨으로써 한순의 반란사건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고려와 형제국의 맹약을 맺은 몽고는 고려에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고압적인 자세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이(崔伊)는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1221년 의주(지금의 덕원), 화주(지금의 영흥), 철관(지금의 철령) 등지에 축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 1223년에는 개경(開京)의 나성을 증축하였다.

그런데 1225년 1월에 몽고(蒙古) 사신 착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도적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 조정에서는 고려가 착고여를 살해했다고 판단하고 보복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고려와 몽고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이 고조되었다.

최이(崔伊)는 이러한 시점에서 자신에게 권력을 확실하게 집중시키기 위해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국정을 결정하고 인사를 단행했다. 이 때 왕(高宗)은 단지 정방(政房)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도장을 찍고 결재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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