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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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8.0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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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몽고군이 철군한 것은 외적으로는 왕(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몽고의 조정에서는 권력 암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군을 하면서도 몽고측은 여전히 끈질기게 출륙환도를 요구하였다.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자 1254년 다시 몽고군은 고려를 침입하였다.이 침입으로 20만의 고려인이 참살당했다.

하지만 별초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항전도 만만치 않아 몽고군도 적지 않은 전사자가 나오면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高宗)은 화의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김수강을 몽고왕에게 보냈고, 김수강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한 몽고왕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출육환도(出陸還都)를 다짐받고 철군을 단행하였다.

몽고군이 철군한 후에도 최향은 고종의 몽고와 친조는 물론이고 출육환도(出陸還都)도 미뤘으며 심지어는 해마다 보내던 공물(供物)도 중단시켜 버렸다.

이 무렵 최향은 중병이 들어 병상에 누었고, 1257년 윤4월에 서자(庶子) 최의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다. 하지만 최의(崔義)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판단력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바람에 최향의 심복인 최양백, 선인렬 등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한편에서는 그들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정권 전복을 노리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또 다시 몽고군이 제7차 침입을 감행해 왔다. 그동안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고는 수위를 낮춰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화친이 성립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 창을 대신 보내자 몽고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58년 4월 유경, 김인준 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써 그동안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자세를 취하던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무너졌다.

그해 12월에 고려 조정은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고에 보내 최의의 죽음을 알리고 출육환도(出陸還都)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왕태자가 40여 명의 대신들과 함께 몽고를 향해 떠났고, 몽고에 입조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어 28년동안 지속되던 고려와 몽고의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죽고 난 후 아들 최이와 최향이 권좌를 넘보고 있었다. 따라서 두 형제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시작되었고, 최향 쪽에서는 최이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최충헌의 측근들 중에 최이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 등은 최충헌이 죽고 나면 최이(崔伊)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최이(崔伊)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거짓으로 통보하여 최이를 유인하였다.

하지만 최이는 그들의 말을 의심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몇차례 더 최이(崔伊)에게 최충헌(崔忠獻)이 찾는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최이는 그들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음모가 탄로 났다고 판단한 김덕명은 최이에게 모의 내용을 고발했다. 그러자 최이(崔伊)는 김덕명을 자기 집에 숨겨 놓았는데 다시 최준문과 지윤심이 찾아와

“최충헌이 급히 찾고 있으니 속히 가보십시오”

하고 말했다.

이 때 최이(崔伊)는 수하 장졸들에게 최준문과 지윤심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최이는 수하 장졸들에게

“지금 즉시 유송절도 잡아오너라”

하고 명령하자 유송절도 체포되어 왔다. 최이는 이들 3명을 유배시키고 최향과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도 유배시켰다. 그리고 며칠 후 최충헌이 죽자 최이는 교정별감에 올라 고려 최고의 권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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