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8.29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4.

그리고 원종은 창안경공 창(왕창)과 함께 쿠릴라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몽고로 떠났다. 임연은 몽고측의 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병을 핑계 삼아 자신의 아들 임유간과 심복들을 보냈다.

쿠릴라이 앞에 선 임유간은 원종 폐립문제를 추궁하자 이장용과 신사전, 원부 등의 탓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격분한 쿠릴라이는 임유간을 감옥에 가두고 임연을 다시 호출했다.

하지만 임연은 몽고의 호출을 거부하고, 야별초로 하여금 백성들을 섬으로 이주토록 하여 몽고와 전쟁을 준비했다.

임연은 삼별초를 사청(射廳)으로 모이게 한 후

“우리는 몽고와 싸워야 하오. 즉시 모이도록 하여라”

하자 삼별초가 모두 무장한 채 모여 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유정, 박송미 등이 모여 들었다. 임연은 우선 대신 중에 덕망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고 말한 후 추밀원사 최온(崔溫)을 불러 들였다. 최양백이 들어선 것을 본 임연은 삼별초군에게 눈짓을 하자 즉석에서 참수해 없애 버렸다.

딸은 남편인 김대재를 도와준 까닭에 평생을 부유하게 지냈지만 최양백은 양다리를 걸친관계로 먼저 희생되었다. 그 다음으로 이일휴의 목을 쳐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살아 있던 최씨 집권시대의 잔당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임연은 근심과 울화증 이기지 못하고 1270년 2월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이 무렵

원종(元宗)은 연경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고, 임연의 교정별감직을 임유무가 계승하였다.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오면서 바로 개경 환도를 시행할려고 하였다. 하지만 임유무는 방호사 및 각 산성별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원종의 개경 환도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그러자 원종(元宗)은 어사중승 홍문계와 직문하성사 송송례를 시켜 임유무를 참살하였다.

이렇게 해서 1백년동안 지속되넌 무신정권은 종식되었고, 40년 가까이 머무러던 강화도 궁궐 시대로 막이 내렸다.

원종(元宗)이 개경에 환도하고 친몽정권이 들어서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배중손은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세우고 관청부서를 설치하여 대장군 유존혁, 상서좌승 이신손 등을 좌우 승선으로 임명했다.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원종(元宗)은 우선 유경 등을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를 달랬지만 삼별초 지휘부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반란 의지를 고수하자 원종은 추밀원사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고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이 때 몽고의 원수 이해도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을 형성했다.

삼별초의 시초인 야별초는 야간 경비를 담당하는 일종의 방범대로 도둑이 들끓자 최여(崔如)가 설치한 조직이었다. 비록 방범대에 불과했지만 야별초는 그 어떤 정규군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최정예부대였다. 이 야벌초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게 되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신의군이 여기에 가세하여 삼별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삼별초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등의 모든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규군의 힘은 약해지고 삼별초가 정규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