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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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1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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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263년 고려는 도서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 때문에 대관서슬 홍저와 첨사부녹사 곽왕부 등을 왜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왜구의 근거지가 대마도임을 확인하고, 왜구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왜국(일본)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마도의 왜구(倭寇)를 진압하였다.

이 사건이후 고려와 왜국(일본)은 나름대로 선린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던 왜국(일본) 사절단이 풍랑을 만나 구주에 임시 정박했을 때도 고려 조정은 그들에게 쌀을 내주고 도움을 주었으며, 난파된 왜국(일본) 상선을 구제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있던 조이는 1267년 1월에 왜국(일본)으로 향하던 몽고(蒙古) 사신이 풍랑으로 되돌아오자 이것을 고려의 고의적인 방해전술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때 몽고 사신들을 안내하던 사람은 송군비와 김찬이었다.

원나라로부터 왜국(일본)문제에 대한 추궁을 받은 고려는 즉시 송군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해명을 하였지만 쿠빌라이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1267년 9월에 일본어에 능통한 반부를 왜국(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 안정공 왕창을 원(元)나라에 보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반부는 왜국(일본)에 당도하여 쿠빌라이의 친서와 고려 국왕의 국서를 전달했지만 왜국(일본) 조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부는 이듬해 7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고려는 이런 사정을 전달하기 위해 반부를 원나라로 보냈다.

고려로부터 왜국(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를 전해들은 쿠빌라이는 몽고 사신을 직접 왜국(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흑산도와 왜국(일본)간의 뱃길을 살피는 시찰단을 보냈다. 말하자면 쿠빌라이는 고려(高麗)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고려 원종에게 보낸 조서는 고려에 대한 이 같은 불신이 잘 적혀 있었다.

“먼젓번에 당신에게 왜국으로 가는 사신의 길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말을 꾸며서 바람과 풍 랑이 몹시 심하여 쉽사리 건널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반부 일행이 어디로 해서 왜국을 다녀왔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처사가 아닌가. 그대가 건널 수 없다는 곳을 건넜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번 보고에는 반부가 왜국에 갔더니 그를 압박하여 돌여보냈다고 했는데 이 말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다시 흑적, 온홍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반드시 왜국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대신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여 이전처럼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말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묻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1268년 12월에 신사전과 전자후, 반부 등의 안내를 받아 원나라 사신을 흑적과 은홍은 왜국(일본)에 입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왜국(일본) 본토에는 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269년 3월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인(倭人) 2명을 데리고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 갔다.

왜인 2명을 데리고 신사전을 비롯한 고려인들과 흑적, 은홍 등이 연경에 도착하자 쿠빌라이는 무척 기뻐하며 고려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왜인 2명에게는 왜국(일본)이 원나라에 내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대마도로 돌아간 왜인 2명은 그 뒤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원나라는 다시 고려를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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