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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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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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과 동시에 기침이 났다. 시의(侍醫)들이 진맥하여 탕재를 먹었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다음 날도 여전히 불편하여 이런 상태가 10여 일 계속되자 마침내 공주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공주의 나이는 39세였다. 작약과 같이 한 송이의 꽃은 영원히 지고 말았다.

그동안 충렬왕과의 권력 쟁탈로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 원은 진왕(晉王)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었고, 어머니(모후)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자 그해 7월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충렬왕을 지지하던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및 최세연, 전숙, 방종서 등과 중랑장 김근을 죽이고 그들의 도당 40여 명을 귀양 보낸 후 다시 원나라로 떠났다.

이렇게 되자 원나라의 왕실은 고려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었고,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를 물러나겠다는 글을 원나라에 보냈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 세자 원이 즉위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제도를 복원하는 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무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충렬왕은 따르던 무리들이 모의하여 충선왕을 참소하자 원나라에서는 단사관을 파견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해 8월에 국새를 빼앗기고 충선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물러나자 왕위는 다시 충렬왕(忠烈王)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충렬왕의 측근에는 간신배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오기(吳祈), 김원상(金元祥), 석천보(石天補), 천경(天卿) 등은 관현방(管絃坊)에 재인(才人)의 수가 모자란다 하여 각도에 사람을 보내 꽃간은 예기(藝妓)들을 모아 들였다. 그래도 부족하여 성중의 관비나 무당 가운데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는 명창들을 궁중에 모아 들여, 비단옷을 입히고 노래와 춤을 연습시켰다.

이 가운데서 우수한 자를 다시 선발하여 머리에 마미립(馬尾笠 - 갓)을 씌우고 남장(男裝)을 시켜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자 이것이 신성(新聲)이었다. 이 노래는 일종의 유행가로서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는 노래였다.

三藏寺裏點燈去

有社主孕執吾手

儻此言孕出寺外

謂上座孕是汝語

삼장사에 점등하러 가니

사주놈이 이내 손을 잡았네

이 말이 밖에 새 나가게 되면

상좌놈아 ! 네 입에서 나온 말이리라

有蛇含龍尾

聞過太山芩

萬人各一語

斟酌左兩心

뱀이 용의 꼬리를 물고

슬그머니 태산을 지나가는듯

여러 사람이 한 마디씩 할 때

너와 나와 두 마음 짐작할게로다

이러한 노래를 곡조에 맞추어 부르며 음탕한 놀이를 즐겼다. 노래 자체가 삼장사를 중심으로 남녀간의 음란한 행위를 상징하는 뜻이었다. 이런 노래가 민요로서 불렸다니 당시의 사회 기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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