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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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2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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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아부하는 무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왕과 함께 삼장사나 혹은 수강궁으로 다니며 놀았고, 밤이 되면 기녀(妓女)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기녀들은 몸을 팔아 치부(致富)를 하였다. 이런 꼴을 본 왕은 그래도 너털웃음만 웃을 뿐이었다.

충렬왕(忠烈王)은 아들 충선(忠宣王)왕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瑞興侯) 전에게 계승시키고 제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 충렬왕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307년 1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성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원나라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려 그동안 자신과 부왕(충렬왕) 사이를 이간질시키던 왕유소(王維紹), 송방영(宋邦英), 송린(宋璘), 송균(宋均), 김충의(金忠義), 최연(崔然) 및 그 무리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부터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忠宣王)이 주관하였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1308년 7월에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호는 정릉이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를 비롯하여 정신부주 왕씨, 숙창원비 김씨, 시비(侍婢) 반주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중 제국대장공주가 충선왕을, 정신부주 왕씨가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등 1남 2녀를, 시비(侍婢) 반주가 소군 서를 낳았다.

장목왕후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와 아속진가돈의 딸로서 봉호는 제국대장공주이며 몽고 이름은 흘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에서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원하자 1274년에 당시 태자 자격으로 원나라에 입조하고 있던 충렬왕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해 11월에 고려에 왔으며, 이듬해 1월에 원성공주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개경에 왔을 때 충렬왕에게는 이미 정화공주(정신부주 왕씨)와 그녀 소생의 1남 2녀, 그리고 시비(侍婢) 반주 소생인 소군 왕서 등의 가족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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