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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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2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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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하지만 그녀는 원나라 세조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정화궁주는 그녀를 대할 때마다 아랫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이는 장목왕후가 고려 출신의 왕비들과는 현격하게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목왕후는 지배국의 공주 신분임을 앞세워 국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은 때대로 그녀의 강압에 못 이겨 정사를 처리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원부인 정화궁주를 감금하여 왕을 만나지 못하게까지 했다.

또한 그녀는 원종의 셋째 아들인 순안공 왕종을 역모로 몰아 그의 모든 재산을 강탈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원종을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모후 정창궁주도 서인으로 전락시켜 궁궐에서 추방했다.

이렇듯 장목왕후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권을 능멸하자 충렬왕은 사냥과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목왕후와 충렬왕 사이에는 갈등이 이어지고 이것이 확대되어 세자 원(충선왕)과 충렬왕의 권력쟁탈로 발전했다.

장목왕후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하였던 인물은 궁인 무비였다. 무비는 충렬왕의 총애를 받으며 주변에 많은 측근들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막강하였다. 충렬왕은 무비와 어울려 가무를 즐겼고, 사냥에도 향상 무비를 대동하고 다녔다.

이러한 왕(충렬왕)의 극진한 배려 때문에 장목왕후는 무비를 어쩌지 못하고 속만 태우다가 1297년 5월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무비가 죽자 당시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세자 원이 귀국하여 모후의 죽음이 궁인 무비와 그 주변 무리들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무비를 비롯한 그 측근들을 죽이고, 도당들도 모두 참수했다.

장신부주 왕씨는 종실 시안군 왕인의 딸이다. 충렬왕이 태손(太孫)으로 머물 때 혼인하여 입궁하였으며,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정화궁주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274년에 제국대장공주가 입국하자 제2비로 전락하여 별궁에 유배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낳았다.

1276년 12월에 어떤 사람이 다루가치 석말천구의 처소에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하고 있으며, 제안공 왕숙과 김방경 등 43인이 반역을 모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투서를 하였다. 이 때문에 정화궁주 및 왕숙, 김방경 등이 하옥되었다. 하지만 재상 유정이 장목왕후를 찾아가 울면서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여 가까스로 풀려났다.

장목왕후 사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장신부주는 충렬왕과 함께 상숭궁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지냈으며, 충렬왕 사후에도 10년을 남게 살다가 1319년에 생을 마감했다. 소생으로는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두 원비가 있다.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으로 있다가 물러난 김양감의 딸이며, 용모가 뛰어난 여자였다. 그녀는 일찍이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으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런데 장목왕후가 죽자 충선왕이 부왕이 총애하던 궁녀 무비를 죽이고 대신 그녀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충렬왕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숙창원비에 봉해졌는데, 충렬왕이 죽은 후 빈전(殯殿)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충선왕과 눈이 맞아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충선왕은 그녀를 숙비로 봉해 다시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충선왕의 이같은 행위는 고려 풍속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몽고에는 부왕이 죽으면 모후를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을 아들이 취하는 풍속이 있어 그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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