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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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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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그녀를 숙비로 맞아들인 충선왕(忠宣王)은 한때 완전히 정사를 폐하고 그녀와 노는데만 열중하기도 했으며,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 방해가 된다하여 팔관회를 정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원나라 왕태후에게 부탁하여 몽고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고고(姑姑)를 구해다가 그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에 대한 충선왕의 애정은 지극했다.

그녀는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도 곧잘 원나라 사신들의 연회에 초대되기도 했고, 궁인들을 거느리고 박연폭포로 나들이를 떠나는 일도 잦았다. 또한 매일같이 사원을 출입하며 승녀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사치를 부리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강양공 왕자는 충렬왕의 맏아들이자 정신부주 왕씨의 소생이다. 그는 맏아들임에 불구하고 제국공주 소생 충선왕에게 밀려 세자에 오르지 못했으며, 제국공주의 미움을 받아 1279년 충청도 아주(牙州) 동심사로 보내져 그곳에서 지냈다. 그 이유는 다섯 살의 어린아이인 세자 원을 위협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하지만 1283년 소환되어 강양공에 봉해졌으며, 1308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는 유, 고, 훈 등의 아들이 있었다.

소군 왕서는 충렬왕의 둘째 아들로 시비(侍婢) 반주 소생이다. 시비 반주는 충렬왕의 태손으로 있을 때 최의의 시비로 있었는데 그가 제거되자 김준에 의해 충렬왕에게 바쳐졌다.

그 후 충렬왕은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왕서이다. 왕서는 제국공주 장목왕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 덕분에 그는 대궐을 마음대로 충입할 수 있었고, 왕소군이라는 호칭도 받았다.

그리고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거만한 행동을 하다가 충렬왕의 눈밖에 나서 1276년에 머리를 깍이고 승려가 되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忠宣王)이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한편으로는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은 충렬왕(忠烈王)의 넷째 아들이자, 계국대장공부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원(謜), 이름은 장(樟), 자는 중앙(仲昻), 몽고식 이름은 이지리부카다. 1277년 1월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1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비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에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과 어머니(모후) 장목왕후의 갈등을 지켜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1287년에는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燕京)에 머물다가 귀국하였으며, 1281년에는 원나라 세조로부터 특진상주국고려국왕세자로 임명되고, 금인(金印)을 받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원나라 세조의 명령으로 원나라를 다녀왔으며, 1296년 11월에는 원나라 진왕의 딸 보다시리와 결혼하여 원나라 왕실의 부마(사위)가 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은 즉위하자마자 정치와 사회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다. 우선 합단 치입시에 공을 세운 사람을 포상하고, 개국 이래의 공신 자손들에게 공신전을 환급함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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