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02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5.

더군다나 1307년에 티무르가 죽고 충선왕이 지지하던 희녕왕 하야샨(무종)이 차가 왕으로 유력하게 부각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마저 상실하였다. 말하자면 이름만 왕일뿐 모든 권력은 충선왕이 쥐게 되었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忠烈王)이 사망하자 충선왕(忠宣王)은 다시 왕위에 올랐다.

10년만에 왕위를 회복한 충선왕은 즉위하자 곧 조정 대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 공평, 인재의 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업과 잠업의 장려, 동성 결혼의 금지, 귀족의 권력 남용과 횡포 엄단 등 강도 높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이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은 가차없이 엄벌하겠다고 공표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충선왕은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즉위 두 달만에 숙부인 제안공 왕숙에세 정권을 대행시키고 다시 원나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즉위시에 발표했던 개혁안들은 허사가 되었고, 고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忠宣王)의 전지(전지 : 멀리서 떨어져 있는 왕이 전달자를 통해 신하들에게 내리는 교서)에 의해 국정 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개경(開京)과 연경(燕京)으로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전지정치는 조정을 불안정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엄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忠宣王)은 원나라 무종(하야샨)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 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세자 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직임이 일었다. 측근들이 이를 감지하고 보고하자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자 감과 그의 측근 김의중을 참살해 버렸다.

충선왕은 이처럼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같이 연경(燕京)으로 이송되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누차에 걸쳐 왕의 환국을 요청하였지만 충선왕은 전혀 환국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그러자 충선왕은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러주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리고 신하들의 환국 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충선왕(忠宣王)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과 왕고 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이 벌어진다.

이렇듯 원나라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곳에서 요수, 염복, 조맹부, 원명선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 하여 고려의 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