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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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0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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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또한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316년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에게 물러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에 걸쳐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함께 누렸다. 하지만 1320년에 인종이 죽고 염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나라 왕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 환관인 입빠이엔토쿠스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번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이 1323년 태정제가 즉위하여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1325년 5월 연경에서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망 후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덕릉에 안치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은 8명의 부인을 두었다. 하지만 이들 8명 중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제외하고 계국대장공주, 의비, 정비 왕씨, 순화원비 홍씨, 조비, 순비 허씨, 궁주 김씨 등 7명의 부인을 두었다. 이들 7명의 부인들 중에서 의비가 세자 감과 충숙왕을 낳았고 궁주 김씨가 덕흥군을 낳았다.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이며 이름은 보다시리다. 1296년에 충선왕과 혼인하였으며,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고려에 왔다.

고려의 왕비가 된 그녀는 충렬왕비 제국공주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자빈으로 있던 조비 등을 밀어내고 제1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부터 부부관계를 맺고 있던 조인규의 딸 조비를 총해하였고, 이를 질투한 계국공주는 음모를 꾸며 조비를 쫓아냈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수하를 시켜 원나라 태후에게 서신을 보냈다. 충선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박경량을 보내 원나라로 향하던 활활불화와 활활대를 저지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하고 하는 익명의 서신이 나붙었다. 이 사건으로 조인규와 그의 처(妻)는 원나라로 압송되었고,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을 하게 되고 조비도 원나라로 끌려갔다.

또한 충선왕도 왕위를 빼앗기도 원나라로 호출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3년 뒤인 1301년 충렬왕은 민훤을 파견하여 계국공주를 개가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충렬왕은 1305년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앞세워 연경으로 직접 가서 계국공주를 개가시킬 작업을 시도했다. 충렬왕은 계국공주를 서흥후 왕전에게 개가시키려 하였고, 왕전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할 생각이었다.

왕전은 인물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충렬왕은 누차에 걸쳐 계국공주가 그에게 매흑되도록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이 같은 충렬왕의 노력으로 계국공주와 왕전은 가까워졌다, 계국공주는 원래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충선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왕전을 마음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307년 원나라의 성종이 죽고 무종이 즉위함에 따라 충선왕의 힘이 강했고, 이 바람에 계국공주의 개가(改嫁)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계국공주의 개가를 주선하던 왕유소 등의 충렬왕파 대신들과 왕전은 충선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 후 계국공주는 충선왕을 따라 일시 귀국했다가 충선왕이 원나라로 떠나자 연경(燕京)에 머물렀고, 1313년 충선왕이 다시 일시 귀국하자 2년동안 머물다가 1315년에 원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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