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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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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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당시 충선왕은 한때 충렬왕의 부인이었던 숙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숙비는 허씨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 간에는 항상 대립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연회장에서 서로의 옷을 뽐내기 위해 두 사람이 모두 한 장소에서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1335년에 사망하였으며 소생은 없었다.

세자 왕감은 충선왕의 맏아들이며 의비 소생이다. 그의 아명은 의충이며 일찍이 광릉군으로 책봉되었다가 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310년에 부왕 충선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개경 남쪽에 묻혔다.

덕흥군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다. 궁녀인 이씨 소생이며 이름은 혜이다. 그녀는 왕족이 아니라 후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몽고식 이름은 탑사첩목아다. 그는(덕흥군)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줄곳 승려로 지내다가 1351년 원나라로 도주했다.

그 후 공민왕이 즉위하자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죽이자 기왕후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래서 기왕후는 고려인 최유에게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게 하여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기왕후는 이 음모를 실천하기 위해 군사 1만 명을 내어 최유에게 주고 고려를 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최유는 압록강 이남 달천에서 패배하고, 덕흥군은 수하들만 데리고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 조정에 김유를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청했지만 덕흥군이 등창을 앓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원나라는 이를 거절 하였다. 그래서 덕흥군은 고려에 압송되지 않고 원나라에 마무르다가. 생을 마감했다.

(20)

충선왕(忠宣王)의 뒤를 이어 고려 제27왕으로 등극한 충숙왕(忠肅王)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인 여자 의비(이름은 也速眞 : 예스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도(燾)이며 이름은 만(卍), 자는 의효(宜孝)이다.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다.

1298년에 강릉군 승선사에 봉해졌다가 성장해서는 강릉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양위를 받아 등극했다.

원래 충숙왕에게는 감(왕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 하나 있었다. 그는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1310년 부왕(충선왕)에 의해 목숨을 숨을 잃었다. 충선왕은 즉위 후 단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조정 대신들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왕의 환국을 청원했으나 거부 당하자 몇몇 신하들이 세자 감(왕감)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권력다툼을 벌여본 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감(왕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왕에 올랐다. 하지만 상왕인 충선왕이 건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왕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충선왕(忠宣王)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로 세운 상태였다.

이 때문에 왕고는 지속적으로 왕위찬탈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욕스럽게 만들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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