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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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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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충숙왕(忠肅王)은 재위 초년에는 충선왕이 일시 귀국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만 해도 하더라도 각 도에서 올라오는 결재서류는 모두 충선왕에게 먼저 올라갔다.

또한 충선왕(忠宣王)은 한때 자신이 108만 승려에게 음식을 먹이고 108만 개의 등에 불을 밝히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이른바 ‘만승회(萬僧會)’라는 행사를 치르는 통에 국고가 탕진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공덕을 10여 개 조목으로 손수 작성하여 은밀히 식목도감에 보내 백관들로 하여금 찬양문을 올리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공명심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행동의 목적은 원나라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충선왕은 낡은 궁궐을 중수하고 민지와 권보에게 명령하여 태조로부터 원종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실록을 7권으로 축약한 <본국편년강목>을 편찬하도록 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고, 왕권은 충숙왕의 차지가 되었다. 이 무렵 연경에 머무르고 있던 충선왕은 전례에 따라 충숙왕을 원나라 왕실의 공주와 혼인하도록 해둘 것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충숙왕을 원나라의 부마(사위)가 되게 함으로써 고려 국왕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충선왕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역력진팔랄공주(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왕실의 부마(사위)가 되었다. 복국공주와 결혼하고 고려로 돌아온 충숙왕은 고려 사람 홍규(洪奎)의 딸을 얻어 덕비(德妃)라 하였다.

그런데 충숙왕은 계국공주의 소생이 아니고 몽고인 여자 예스진(也速眞 : 의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왕은 고려말 보다 몽고말을 더 잘 했으며, 모든 생활풍습이 몽고식에 젖어 있었다.

고려(高麗)에 들어와 고려의 여자를 대하니 쓸쓸하고 사막이 많은 몽고(蒙古) 보다는 산천이 수려한 아름다운 고려(高麗)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산천과 풍경이 그럴 뿐 아니라 덕비(德妃) 홍씨를 대하고 보이 덕(德)이 있고 총명하여 더욱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충숙왕(忠肅王)이 등극한지 9년째 되는 해였다. 왕의 유흥은 점점 심해졌고,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덕비(德妃) 홍씨만을 사랑하여 항상 묘련사(妙蓮寺)에 드나들며 유흥에 빠졌다.

그해 9월 어느 날 충숙왕은 공주(복국장 공주) 몰래 덕비(德妃) 홍씨만을 데리고 묘련사로 놀러 나갔다. 공주는 시기하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왕이 묘련사에 간 것을 알고 시녀(侍女) 몇 사람을 데리고 묘련사로 쫓아갔다.

공주는 짐작으로 충숙왕이 법당 아닌 다른 방에서 놀고 있을 줄 알고 이 방 저 방 찾던 중, 바로 법당 뒤 아늑한 방에서 덕비 홍씨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엿듣다가 울분이 북닫쳐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눈앞에는 상상했던 것처럼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충숙왕은 깜작 놀라 공주를 노려 보았다.

“공주, 이게 무슨 짓이오. 남의 방문을 함부로 열다니오”

하며 공주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이오. 일국의 왕이 정치는 돌보지 않고 유흥에만 즐기다니요. 그것도 성스러운 법당 옆에서 추잡한 행동을 하시다니 그게 될 말씀이오”

“잔소리 마시오”

충숙왕(忠肅王)의 말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서 환궁하옵소서”

“공주나 환궁하도록 하시오. 나는 가지 않겠소이다”

충숙왕의 말이 이에 이르자 공주도 더 이상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공주를 모욕한다는 것은 원나라 왕실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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